빅토르 4세 [Antipope Victor IV] 대립 교황

빅토르 4세 [Antipope Victor IV] 대립 교황

  • 본명 : 옥타비아노 데 몬티첼리 (Octaviano de Monticelli)
  • 출생 : 1095년경
  • 사망 : 1164년 4월 20일
  • 대립 교황 재위 : 1159년 ~ 1164년
  • 지지자 :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 정통 교황 : 알렉산데르 3세 (Pope Alexander III)
  • 후계 대립 교황 : 파스칼 3세 (Paschal III)

대립 교황 빅토르 4세(1159~1164)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정치적 지지를 바탕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황인 알렉산데르 3세에 맞서 교황 자리에 올랐다. 그의 존재는 12세기 중반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반영한다.

【출생과 초기 생애】

빅토르 4세의 본명은 옥타비아노 데 몬티첼리(Octaviano de Monticelli)이며, 1095년경 이탈리아 몬테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로마에서 신학과 법률, 수사학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시절인 1138년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이후 로마 교회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1137년경에는 베네벤토의 행정관(governor)으로 활동했으며, 1138년에는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San Nicola in Carcere)의 추기경 사제가 되었고, 1151년에는 산타 체칠리아(Santa Cecilia)의 추기경직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언변과 외교 능력으로 잘 알려졌으며, 당대 문헌에서는 “예술적이고 웅변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합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신중하면서도 다소 완고하고 인색한 성품을 가졌다는 평도 있었다.

【대립 교황으로의 즉위】

1159년, 교황 아드리아노 4세(Pope Adrian IV, c.1100~1159, 재위 1154~1159)의 죽음 이후, 추기경단은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를 열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추기경들은 롤란도(Rolando Bandinelli, c.1100/1105~1181)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데르 3세(Pope Alexander III, 1159~1181)이다.

하지만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 1122~1190, 재위 1155~1190)를 중심으로 한 황제파 추기경들(9명)은 이 선출을 거부하고, 옥타비아노를 자신들의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빅토르 4세라 칭했으며, 즉위식은 1159년 9월 7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이렇게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며, 서방 교회는 둘로 분열되었다.

【교황권 분열과 정치적 대립】

빅토르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데르 3세의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황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빅토르 4세는 오토 폰 비텔스바흐(Otto von Wittelsbach)의 무장 지원과 자신이 조직한 무장 병력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로마 시내와 성 베드로 영토(Patrimony of St. Peter)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통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시칠리아 왕국 영토로 피신했다가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두 교황은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사절단(legates)을 각각 파견하였다. 프리드리히 황제(Frederick Barbarossa)는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성직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1160년 2월 파비아(Pavia)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약 50명의 대주교 및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황제는 1159년 12월에 크레마(Crema)를 점령한 후, 두 교황 모두를 파비아로 소환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는 이를 거절하며, 교황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는 빅토르 4세(Victor IV)를 지지한다고 공식 선언했으며, 회의 참석자들 역시 예상대로 빅토르 4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고, 알렉산데르 3세에게 파문(anathema)을 선고하였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내 대부분의 주교단은 이 결정에 동조했지만, 빅토르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독일 내에서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잘츠부르크의 에버하르트 주교(Bishop Eberhard of Salzburg)가 빅토르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에 맞서 알렉산데르 3세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와 빅토르 4세 모두를 파문하였다.

1159년부터 1162년까지, 빅토르 4세는 네 차례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모든 회의는 알렉산데르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규탄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 것이었다.

  • 파비아(Pavia) 공의회 : 1160년 2월
  • 로디(Lodi) 공의회 : 1161년 6월
  • 생장드로스느(St.-Jean-de-Losne) 공의회 : 1162년 9월
  • 트리어(Trier) 공의회 : 1162년 11월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은 두 교황 중 한 명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덴마크의 국왕 발데마르 1세(King Valdemar I)도 빅토르 4세(Victor IV)를 지지했지만, 덴마크 교회의 수장이었던 룬드 대주교 에스킬(Eskil of Lund)은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를 지지하는 측으로 돌아섰다. 폴란드 역시 빅토르 4세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데르 3세는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과거 힐데브란트(Hildebrand) 시절부터 각국 교회에 대한 교황권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 황제(Henry III, Holy Roman Emperor)가 행사했던 것과 같은 제국의 교황 통제권 부활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다.

그 결과, 다음 국가들이 알렉산데르 3세를 정통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프랑스, 잉글랜드, 카스티야, 스웨덴,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헝가리, 시칠리아 왕국, 성지의 십자군 국가들(Outremer)

당시 상황은 단순한 종교적 분열을 넘어선 유럽 전체의 정치적 재편성으로 이어졌으며, 교황청과 황제의 권력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사망과 이후】

빅토르 4세는 알렉산데르 3세와의 교황권 경쟁을 계속 이어갔으나, 결국 1164년 4월 20일, 이탈리아 루카(Lucca)에서 사망하였다. 루카 대성당과 산 프레디아노(San Frediano) 성당의 성직자들은 빅토르 4세가 파문당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는 근처의 한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황제 바르바로사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후임으로 파스칼 3세(Paschal III, c.1110~1168, 재위 1164~1168)를 새 대립 교황으로 세웠다.

알렉산데르 3세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 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정통 교황으로 남게 되었다.

【역사적 의의】

빅토르 4세는 중세 중기 유럽에서 세속 권력(황제권)과 교회 권력(교황권)의 충돌을 상징하는 인물로, 정통성과 권위의 의미가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던 시대의 실례이다. 그의 존재는 단순한 “이단 교황”이라기보다는,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황제 중심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시대는 이후 교황권의 강화, 추기경단의 독립성 확보, 그리고 중세 교황청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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