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전과 총독부의 공작, 분열의 씨앗
일본은 1945년 8월 13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과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다. 이 소식은 즉각 조선총독부에 전달되었고, 총독부는 패전 후 대책 수립에 골몰했다. 총독부의 종전 대책의 초점은 치안 유지였다. 패전 후 발생할지도 모를 폭동ㆍ방화ㆍ살인ㆍ약탈 등 무정부상태의 방지와 일본인의 생명ㆍ재산 보호가 필요했다. 요체는 패전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한국인 청년ㆍ학생ㆍ노동자와 반일적 움직임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 달려있었다. 군대, 헌병, 경찰 등 물리력을 동원해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진압할 수 있지만, 흥분된 상태에서의 무력 사용은 더 큰 반발과 참사를 빚어낼 가능성이 컸다… 총독부는 진주할 연합군에게 항복할 때까지 치안 유지를 위해 한국인 청년ㆍ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반이적이지만 총독부와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물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총독부는 중도 좌파의 여운형(1886~1947)과 우파의 송진우(1890~1945)를 선택했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ㆍ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여운형과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가 된 송진우는 국내 좌우파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이미 1930년대 대표적 신문사 사장을 지낸 라이벌이었다. 여운형에게는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송진우에게는 경찰이 접근했다. 여운형은 정치범의 석방, 식량의 확보, 치안유지 협조, 자율권 인정 등 5개 조건을 제시하며 총독부의 치안 유지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는 등 1943년 이해 해방ㆍ건국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여운형은 해방 후 벌어질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한국인들의 주체적 정치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건국동맹이라는 조직명에서 드러나듯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을 기정 사실로 전제한 후 다음 단계인 건국 준비를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었다. 예견된 해방, 준비된 대책이었다. 한편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동아일보ㆍ보성전문그룹의 송진우에게 접근했다. 송진우는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이를 거절했다. 훗날 한민당은 송진우가 일제의 친일정부 수립 제안을 거절했으며, 이는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의 귀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진우 그룹은 일제 말 소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은둔ㆍ침묵한 상태였으며, 적극적 항일의지나 조직적 해방 준비 작업과는 거리가 있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가 정국을 주도하자 한민당은 여운형이 총독부의 후원하에 친일정부 수립을 시도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원한 것은 한인 정부 수립이 아니라 연합군이 진주하기 직전 과도적 시기의 치안 유지 협조였다.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가 패전의 결과 항복해야 할 대상은 연합국이었다. 총독부는 한국인에게 통치권ㆍ행정권을 이양할 계획이나 권한이 전혀 없었으므로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에 관한 협조를 요청했을 뿐이다. 일본은 비록 패전했지만 한반도에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기를 원했고 여러 종류의 전후 공작을 기획했다. 건준에 대한 지원ㆍ통제가 양지의 것이었다면, 8월 16~17일간 전국 주요 역에서 벌어진 소련군 진주 소동, 김계조의 댄스홀 사건 등은 음지에서 벌어진 공작이었다.
정병준 외, 『한국현대사 1 –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서울: 푸른역사, 2018), 24~28 |
여운형과 송진우
조선총독부가 패전 이후 찾아간 두 사람은 여운형과 송진우였다. 이것은 일제가 계획했던 아니던 우리로서는 이후 좌우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분열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이때 송진우가 일본의 제안을 친일정부 수립을 거절한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이후 치안 유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서 거절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의 상황에서 우익보다는 좌익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본다면, 위에서 언급했듯 그에게 ‘적극적인 항일의지나 조직적인 해방 준비 작업’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여운형은 준비된 지도자였고, 송진우는 준비가 필요했던 지도자였다.
총독부의 속셈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총독부가 여운형이나 한인들에게 통치권을 이양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조선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연합국에게 패배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연합국에 최대한 잘 보여야 했다. 흔히 약한 학생을 괴롭히던 일진 학생은 선생님이 나타나면 갑자기 친한 척하면서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선생님에게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하나가 되지 못한 아쉬움
어쩌면 해방 공간에서 그러한 일본의 속셈을 간파하고 선수를 치며 움직였던 인물이 여운형이었다. 그는 치안 유지의 협조뿐만 아니라 사상범들의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솔직히 이러한 여운형의 움직임은 이후 총독부와 일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이후에 당파적으로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주적인 일본을 쫓아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에 합의가 되었더라면, 여운형과 송진우가 손을 잡고 임정 요인들과 하나의 목소리를 냈더라면, 미군정이 들어서더라도 보다 주체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독립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8월 15일이 되자 금방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너무 흥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친일파 청산과 국제정세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단결했어야 하는데, 한 명은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분단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었고, 그러한 사람 뒤에서 줄을 서서 정치적 이익을 얻어보려는 한민당과 친일파 잔당들의 모습은 8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