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카이로회담과 연합국의 입장
1942년 12월 1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 연합 4대국은 카이로회담의 결과를 발표하며 ‘한국인들의 노예상태’에 주목해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과 자유를 회복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수많은 식민지 가운데 독립이 보증된 국가는 한국뿐이었지만, 이것이 즉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이로 선언의 함의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공약은 장제스의 강력한 주장에 힘입은 것이었고, 그 배경에는 중국 내에서 오랫 동안 투쟁했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독립운동세력의 노력이 자리했다. 둘째, ‘적절한 시기’는 즉시 독립이 아니라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쳐야 한다는 루스벨트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한국은 미국의 구상인 신탁통치와 중국의 주장인 즉시 독립의 타협안으로 ‘적절한 시기’에 독립할 국가로 지목되었다. 셋째,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현재 좌표가 ‘노예상태’에 있다고 규정했다. 이는 일본의 가혹한 통치를 표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이 오랜 기간 식민지 노예상태였던 터라 민주적 훈련이 결여되어 있고 자치정부 수립ㆍ운영 능력이 없다는 연합국의 대한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연합국에게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될 ‘신생 국가’의 예비후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한국의 자치 능력과 전후 지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해방 후 정치적 대폭발의 외적 진양이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공식 대한 정책으로 상정했다.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구상이자 신념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기 우드로 윌슨의 위임통치론을 계승한 다자간 국제 신탁통치계획을 통해 2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식민지를 처리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소련은 한반도가 오랜 식민통치와 계급적 착취로 인한 민족적 갈등과 계급적 대립이 혁명적 정세를 빚어내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외세의 간섭이 없다면 자연스레 친소ㆍ좌파적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 예상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필리핀처럼 한국에도 20~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선호한다고 답변했다. 정병준 외, 『한국현대사 1 –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서울: 푸른역사, 2018), 21~23. |

카이로회담에 참여한 4개국 중에서 그래도 한국의 상황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중국의 장제스 뿐이었을 것이다. 장제스에게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국의 즉시 독립을 요청했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해석 이전에 팩트가 중요한데, 당시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달랐기 때문에 서로 일치된 의견을 도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향후 한반도의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우선 미국은 한반도에 최대 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소련은 즉각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면 소련이 한반도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최종 목표는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즉각 독립을 강하게 주장했던 중국의 장제스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장제스 역시 향후 친중 정부를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외교에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협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 서러운 것은 연합국이 우리를 노예 상태에 있는 열등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민주적 훈련이 결여되어 있고, 자치정부를 자체적으로 수립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여운형의 건준은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