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 출생: 미상 ☞ 모본왕보다 먼저 태어난 호동 왕자가 기원후 22년 전후에 태어났고, 32년 12월에 태자가 되었으니, 모본왕은 22년과 32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망: 기원후 53년 11월(음력) 재위: 기원후 48년 ~ 기원후 53년 11월(음력)
전임: 민중왕 후임: 태조대왕
【가계 정보】
조부: 유리명왕(瑠璃明王) – 고구려 2대 국왕. 조모: 왕후 송씨(王后 松氏) –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그는 제3대 왕 대무신왕과 그 원비(元妃)의 자식이다. 차비의 아들 이복형제 호동과의 태자 다툼에서 승리했다. 원비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호동을 모함하여 자살하게 했다. 11월, 이복형제 호동이 자살하고 12월에 태자가 되었다.
한편 광개토왕비에는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기록도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대무신왕이 그의 할아버지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모본왕의 아버지는 호동이라는 설이 된다. 원비는 호동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딴 여자에게 눈이 팔리자 참소했다는 설이 가능하다.
【기원후 44년】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숙부 해색주(민중왕)가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다른 설에는 민중왕이 그의 형제라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는 대무신왕이 죽을 때 그의 나이가 어려 숙부 민중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후 48년】
민중왕이 죽고 그가 즉위하였다.
10월, 왕자 익(翊)을 태자로 삼았다.
【기원후 49년】
모본왕이 장수를 보내 후한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후한의 요동태수 채융(祭肜)과 화친하였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여름에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기원후 51년】
날로 포악해져 늘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아 누웠으며 혹시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였다.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
【기원후 53년】
11월, 모본왕을 곁에서 모시던 모본(慕本) 사람 두로(杜魯)에게 살해당했다.
모본왕(慕本王)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재사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재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재사(再思)의 아들 궁(태조대왕)이 제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궁의 성은 고씨(高氏)이므로 모본왕을 마지막으로 하여 소노부(消奴部) 출신의 유리왕계의 해씨왕시대(解氏王時代)는 끝이 나고 계루부 고씨(桂婁部高氏)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고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