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善德女王, AD. ?~647] 신라의 제27대 국왕(AD. 632~647)

선덕여왕 [善德女王, AD. ?~647] 신라의 제27대 국왕(AD. 632~647)


【개인 정보】

  • 이름 : 덕만(德曼), 만(万)
  • 출생 : 미상
    사망 : 기원후 647년 8월
    재위 : 기원후 632년 1월 ~ 기원후 647년 8월
  • 전임 : 진평왕
    후임 : 진덕여왕

【가계 정보】

  • 부왕 : 진평왕(眞平王, 567~632년, 재위 : 579~632)
    모후 : 마야부인(摩耶夫人)
  • 언니 : 천명공주(天明公主) – 태종 무열왕의 어머니이다.
  • 계모 : 승만부인(僧滿夫人)
  • 자매 : 선화공주(善花公主) –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며 백제 무왕의 왕비이자 선덕여왕의 동생이다.
  • 남편 : 김인평(金仁平)
  • 남편 : 을제(乙祭)
  • 남편 : 백반(伯飯)

【선덕여왕 연보】

【기원후 632년】

  •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석하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었기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앞의 임금 때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꽃은 비록 아주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와 벌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꽃씨를 심어보았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 원년(서기 632) 2월,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 겨울 10월, 사람을 보내 나라 안의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노인,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서기 633년】

  • 2년(서기 633) 봄 정월,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 2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서기 634년】

  • 3년(서기 634) 봄 정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3월, 우박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밤만 하였다.

【서기 635년】

  • 4년(서기 635),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 돌이나 대나무, 옥으로 만든 신표)을 가지고 왕을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 겨울 10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또는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두루 돌며 위로하였다.

【서기 636년】

  • 5년(서기 636)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3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론케 하고 1백 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 여름 5월, 개구리가 궁궐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개구리의 성난 듯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지명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웃나라 병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려고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서기 637년】

  • 6년(서기 637) 봄 정월,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으로 삼았다.
  •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서기 638년】

  • 7년(서기 638) 봄 3월, 칠중성(七重城)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서른다섯 보를 옮겨갔다.
  • 가을 9월, 노란색 꽃이 비처럼 내렸다.
  •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자,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장군 알천(閼川)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 11월, 알천이 고구려 병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서기 639년】

  • 8년(서기 639) 봄 2월,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에게 명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 가을 7월, 동쪽 바닷물이 붉게 변하고 또한 뜨거워져서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

【서기 640년】

  • 9년(서기 640) 여름 5월, 임금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당의 태종은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 모아 학업을 가르치는 관원(官員)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들러 그들에게 강론하도록 하였다. 학생으로서 대경(大經, 『예기』와 『춘추좌씨전』) 가운데 하나 이상에 능통한 사람은 모두 관직을 주었고, 학당의 교사(校舍)를 1천2백 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학생 수를 늘려 3천2백6십 명을 채우니,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당나라의 서울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때에 고구려, 백제, 고창(高昌), 토번(吐蕃)에서도 역시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서기 642년】

  • 11년(서기 64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가을 7월, 백제왕 의자(義慈)가 병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 8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党項城, 경기 화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임금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고하였다.
  • 이달에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병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都督)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 죽죽(竹竹)ㆍ용석(龍石) 등이 그곳에서 죽었다.
  •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였다. 앞서 대야성이 패배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얼마가 지난 후에야 말하였다.
    “슬프구나!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손에 넣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곧장 임금을 찾아뵙고 말하였다.
    “제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병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복수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高臧, 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에, 병사들로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었다.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병사를 내보낼 수 있으리라.”
    춘추가 대답하였다.
    “저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고자 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좋게 지내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저는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고장이 그 말의 공손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춘추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임금은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진군하게 하였다. 유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한강(漢江)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에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주어 돌려보냈다.
  •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경북 경산) 군주로 삼았다.

【서기 643년】

  • 12년(서기 643)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3월, 당나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배우던 고승 자장(慈藏)이 돌아왔다.
  •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빼앗고자 이번 9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리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社稷)은 보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보려 하오니, 약간의 병사라도 빌려주어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 신라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당하는 것을 참으로 애닯게 여겼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돌아서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너희 나라를 집어삼켜 땅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는구나. 너희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써 나라의 멸망을 면하려고 하는가?”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 너희 나라의 위급함은 해결이 될 것이니, 1년 정도는 포위가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군을 계속해서 보내지 않을 것을 저들이 알게 되면 도리어 멋대로 침략을 할 것이다. 그러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스러워지고, 너희 나라도 편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나는 또한 너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다. 두 나라의 병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우고 벌여 놓으면 그들이 보고서 우리나라의 군사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난잡하게 섞여 서로 즐기기만 하고 있으니, 나는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병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기습하겠다. 그런데 그대의 나라는 여인을 임금으로 삼았기에 이웃나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주인이 없어지면 도둑이 들끓는 것처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그가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마땅히 병사들을 보내 보호하면서, 너희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잘 생각해 보게나.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다만 “예.” 라고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황제는 그의 됨됨이가 어리석고 못나서, 병사를 청하고 위급한 사정을 고할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서기 644년】

  • 13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조서를 들려 보내어 고구려에게 말하였다.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으니, 너희들과 백제는 즉시 병사를 거두어야만 한다. 만약 또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반드시 병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그러자 개소문(蓋蘇文)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원한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이 이미 오래 되었다. 예전에 수나라가 잇달아 침범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오백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들이 땅을 돌려주고 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이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이제 와서 따지는 것입니까?”
    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 가을 9월, 임금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크게 승리를 거두고 일곱 성을 빼앗았다.

【서기 645년】

  • 14년(서기 645)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못했을 때 백제의 대군이 다시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유신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집에 가보지도 못하고 정벌하러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 3월,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아뢰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을 때, 백제가 또다시 침공했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임금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그대의 한 몸에 달렸으니 노고를 꺼리지 말고 가서 그들을 도모해 주시오.”
    유신은 또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하였다. 서쪽으로 행군하는 길에 자기 집의 문을 지나게 되었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
  • 3월, 황룡사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 여름 5월, 당 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내어 도왔는데, 백제가 그 빈틈을 타고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 겨울 11월,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서기 647년】

  • 16년(서기 647) 봄 정월,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반역을 꾀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 8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정관 21년(서기 647)에 죽었다.’ 하고 『통감(通鑑)』에서는 ‘22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서 고찰해 보건대 『통감』의 기록이 잘못된 듯하다.]
  • 사관이 논평한다.
    나는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는데, 그녀는 올바른 천자(天子)가 아니었고 복희(伏羲)를 도와 9주(九州)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呂雉)와 무조(武曌) 같은 이는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나와서 천자처럼 정치를 행하였으나,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하게 임금이라 일컫지 않고 단지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나 측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경우로 말하자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易經)』에서는 “암퇘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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