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 [宣德王, AD. ?~785] 신라 제37대 국왕(AD. 780~785)
【개인 정보】
- 이름 : 김양상(金良相)
- 출생 : 미상 – 아버지인 김효방이 734년에 사망했으므로 선덕왕은 최소 734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망 : 기원후 785년 1월 13일(음력)
재위 : 기원후 780년 4월 ~ 기원후 785년 1월 13일 - 전임 : 혜공왕(惠恭王)
후임 : 원성왕(元聖王)
【가계 정보】
- 조부 : 김원훈(金元訓)
- 외조부 : 성덕왕(聖德王) – 신라 제33대 왕
외조모 : 성정왕후(成貞王后) - 아버지 : 김효방(金孝芳) 해찬(海飡)으로 개성왕(開聖王)에 추봉
어머니 : 사소부인(四炤夫人)
계모 : 정의부인 박씨(貞毅夫人 朴氏) - 왕비 : 구족왕후 김씨, 각간(角干) 양품(良品)의 딸
【선덕왕 연보】
【기원후 780년】 선덕왕 원년
-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良相)이다. 내물왕(奈勿王)의 10대손이다. 아버지는 해찬 효방(孝芳)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조부인(四炤夫人)으로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 양품(良品)의 딸이다.[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한다.]
-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아버지를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경신(敬信)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의공(義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 어룡성(御龍省)의 봉어(奉御)를 경(卿)으로 고쳤다가 경을 다시 감(監)으로 고쳤다.
【기원후 781년】 선덕왕 2년
- 봄 2월, 임금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 가을 7월, 임금이 사신을 보내 패강(浿江) 남쪽의 주와 군을 위로하였다.
【기원후 782년】 선덕왕 3년
- 봄 윤 정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2월, 임금이 한산주(漢山州)를 순행하고 백성들을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겼다.
- 가을 7월, 시림(始林)의 들판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기원후 783년】 선덕왕 4년
- 봄 정월, 아찬 체신(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로 삼았다.
- 2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기원후 784년】 선덕왕 5년
- 여름 4월, 임금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했다. 여러 신하들이 세 번이나 간언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기원후 785년】 선덕왕 6년
- 봄 정월, 당 덕종(德宗)이 호부낭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을 지절사(持節使)로 보내 임금을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雞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 이달에 임금이 병으로 누웠다. 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과인은 본래 재능이 없고 덕이 적어 왕위에 오를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를 피할 수 없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는 동안 해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백성의 일상생활이 곤궁하여졌으니, 이는 모두 덕이 백성들의 소망에 부합되지 않고 정치가 하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항상 왕위를 물러나 궁궐 밖에 살고자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이 그때마다 지성으로 말렸기 때문에 매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었다. 이제 갑자기 병이 나서 다시 회복이 어렵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죽은 후에는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할 것이며 유골은 동해에 뿌리도록 하라.” - 13일에 돌아가셨다. 시호를 선덕(宣德)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