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眞德女王, AD. ?~654] 신라의 제28대 국왕(AD. 647~654)

진덕여왕 [眞德女王, AD. ?~654] 신라의 제28대 국왕(AD. 647~654)


【개인 정보】

  • 이름 : 김승만(金勝曼)
  • 출생 : 미상
    사망 : 기원후 654년 3월
    재위 : 기원후 647년 8월 ~ 기원후 654년 3월
  • 전임 : 선덕여왕(善德女王)
    후임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가계 정보】

  • 조부 : 동륜태자(銅輪太子, ?~572)
    조모 : 만호부인(萬呼夫人)
  • 부 : 국반 갈문왕(國飯葛文王)
    모 : 월명부인 박씨(月明夫人 朴氏)
  • 배우자 : 김기안(金基安)?
  • 외조부 : 만천 갈문왕(滿天葛文王)

【진덕여왕 연보】

【서기 647년】

  •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친동생인 국반(國飯)[혹은 국분(國芬)이라고도 한다.] 갈문왕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넉넉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고 한다.
  • 원년(서기 647) 정월 17일, 비담(毗曇)의 목을 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 2월,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강원 춘천) 군주로 삼았다.
  • 당 태종이 지절사(持節使)를 보내어 선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왕을 주국낙랑군왕(柱國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 가을 7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사례하였다.
  •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었다.
  • 8월, 혜성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무산(茂山)ㆍ감물(甘勿)ㆍ동잠(桐岑)의 세 성을 포위했으므로, 임금이 유신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막도록 하였다. 그들은 힘겹게 싸우다가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거칠게 싸우다가 죽으니, 여러 병사들이 모두 힘을 내어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 11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서기 648년】

  • 2년(서기 648)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3월,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임금이 이를 염려하여 압독주(押督州) 도독 유신에게 명하여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유신은 장수와 병졸들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진군하였다. 의직이 막아서자 유신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夾擊)하였다. 백제 병사가 패하여 달아나므로, 유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주되 공적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사신으로 보내어 당에 조공하게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御史)를 시켜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라고 물었다.
    질허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천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 책력, 달력)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法興王) 이래로 우리 나름의 연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습니까?”라 하자, 태종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교외까지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궐에 당도하자 춘추의 용모가 영준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의 현인들에게 지내는 제사)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주었다.
    어느 날 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을 해보겠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며, 더욱이 지난 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켜 대국에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서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병사의 파견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옷을 꺼내게 하여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내려 주었으며,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춘추 등이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3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송별연을 열었으니, 춘추를 우대하는 예절의 극진함이 이와 같았다.
    춘추가 아뢰었다.
    “제게는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문왕에게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 밤낮으로 곁을 지킴)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원문에 글자가 2자 빠져 있음]에게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춘추의 시종인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를 쓰고 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순라병이 그를 춘추로 여기어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당도하였다.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려주었다.

【서기 649년】

  • 3년(서기 649) 봄 정월,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 가을 8월, 백제의 장군 은상(殷相)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살성(道薩城) 아래 주둔하였다.
    유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이 염탐하러 올 것이니,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누구인지 묻지 말거라.”
    그리고 사람을 시켜 군진 안을 돌아다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방어벽을 단단히 지키며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결전할 것이다.”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은 병사가 증원될 것이라 여기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장수 1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을 빼앗았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병장기를 획득하였다.

【서기 650년】

  • 4년(서기 650) 여름 4월, 임금이 명을 내려 진골로써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牙笏, 상아로 만든 홀, 홀은 임금을 만날 때 의복을 갖추어 입고 손에 쥐던 물건)을 갖게 하였다.
  •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군대를 격파한 사실을 알렸다. 임금이 비단에 오언시인 태평송(太平頌)을 써서,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보내 당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나라 왕업(王業)을 여니,
    높고도 높은 황제의 길 창창히 빛나네.
    전쟁을 그쳐 천하를 평정하고,
    문물을 닦아 백대를 이어가리.
    하늘을 본받음에 은혜가 비오듯 하고,
    만물을 다스림에 도리와 한몸 되네.
    지극히도 어질어 해와 달과 짝하고,
    운까지 때맞추니 언제나 태평하네.
    크고 작은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이며,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리 우렁찬가
    외방 오랑캐 명을 거역하는 자는,
    칼날에 엎어지는 천벌을 받으리라.
    순박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먼 곳 가까운 곳 상서(祥瑞)로움 다투네.
    사계절이 옥촉(玉燭)처럼 조화롭고,
    해와 달과 별들이 만방에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받아 어진 재상 내리시며,
    황제는 충후한 인재를 등용하도다.
    삼황과 오제의 덕망이 하나되어,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라.
    당 고종이 이 시를 가상하게 여기고, 법민을 태부경(太府卿)에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 이 해에 비로소 중국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 사관이 논평한다.
    삼대(三代, 하ㆍ은ㆍ주)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를 칭한 것은 모두가 대통일을 이루고서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같은 때에 나란히 일어나 천하를 다투며 양립한다거나, 간사한 영웅이 기회를 얻어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변두리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나라는 결코 사사롭게 연호를 칭할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이 타고 가는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연달았는데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했으니 이해하지 못할 노릇이다. 그 후에도 그러한 잘못된 연호를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의 나무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에 와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고칠 수는 있었다고 할 만하다.

【서기 651년】

  • 5년(서기 651) 봄 정월 초하루, 임금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에 하례하는 예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2월,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執事中侍)로 삼아 기밀업무를 관장케 하였다.[원문에 3자 빠져있음]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서기 652년】

  • 6년(서기 652) 봄 정월, 파진찬 천효(天曉)를 좌리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3월, 서울에 큰 눈이 왔다.
  • 왕궁 남쪽 문이 아무 까닭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서기 653년】

  • 7년(서기 653)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서기 654년】

  • 8년(서기 654) 봄 3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였으며, 진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부의로 비단 3백 필을 내려주었다.
  •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기(新羅記)』에서 “그 나라에서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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