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眞興王, AD. 534~576] 신라의 제24대 국왕(AD. 540~576)
【개인 정보】
- 이름 : 김삼맥종(金三麥宗), 김심맥부(金深麥夫)
법명 : 법운(法雲) - 출생 : 기원후 534년
사망 : 기원후 576년 8월
재위 : 기원후 540년 7월 ~ 기원후 576년 8월 - 전임 : 법흥왕(法興王)
후임 : 진지왕(眞智王)
【가계 정보】
- 아버지 :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어머니 : 지소태후(只召太后) - 왕비 : 사도왕후 박씨(思道王后 朴氏) – 박영실과 옥진궁주의 딸
- 장남 : 동륜태자(銅輪太子)
- 차남 : 신라 제25대 왕 진지왕(眞智王)
- 삼남 : 김구륜(金仇輪)
- 장녀 : 태양공주(太陽公主)
외손 : 태원공(太元公)
외손 : 호원공(好元公) - 차녀 : 아양공주(阿陽公主)
외손 : 김서현(金舒玄) - 삼녀 : 은륜공주(銀輪公主)
외손 : 효종(孝宗)
외손 : 하희(夏姬)
외손 : 월희(月姬) - 사녀 : 월륜공주(月輪公主)
- 후궁 : 숙명궁주(叔明公主) – 태종와 지소태후의 딸
서자 : 정숙태자(貞肅太子) - 후궁 : 보명궁주(寶明宮主) – 구진과 지소태후의 딸
- 후궁 : 미실궁주(美室宮主) – 미진부와 묘도부인의 딸
- 후궁 : 월화궁주(月華宮主) – 가야국의 왕 이뇌왕과 신라 양화공주의 딸
서자 : 천주공(天柱公)
서녀 : 덕명공주(德明公主) - 후궁 : 금진낭주(金珍宮主) – 위화랑과 오도낭주의 딸
- 후궁 : 소비 부여씨(小妃 扶餘氏) – 백제 성왕의 딸
【진흥왕 연보】
【서기 540년】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이다. 이때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法興王)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임금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 원년(서기 540)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서기 541년】
- 2년(서기 541)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서기 544년】
- 5년(서기 544) 봄 2월, 흥륜사(興輪寺)가 완성되었다.
- 3월,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서기 545년】
- 6년(서기 545)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였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548년】
-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서기 549년】
- 10년(서기 549) 봄, 양(梁)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을 보내어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내왔다. 임금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서기 550년】
-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서기 551년】
- 12년(서기 551) 봄 정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서기 552년】
- 13년(서기 552), 임금이 계고(階古)ㆍ법지(法知)ㆍ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배움이 끝남에 임금이 그들에게 연주를 시켜보고서 말하였다.
“예전에 낭성에서 들었던 음악과 다름이 없구나.”
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서기 553년】
- 14년(서기 553) 봄 2월,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서기 554년】
-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서기 555년】
- 16년(서기 555) 봄 정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 겨울 10월,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영토의 국경을 정하였다.
- 11월,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서기 556년】
- 17년(서기 556) 가을 7월,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서기 557년】
- 18년(서기 557), 국원(國原, 충북 충주)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서기 558년】
- 19년(서기 558) 봄 2월,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 나마 신득(身得)이 포노(砲弩, 돌을 쏘도록 만든 무기의 일종)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서기 562년】
- 23년(서기 562) 가을 7월,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보내 막아 싸우게 하였다.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서기 564년】
- 25년(서기 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서기 565년】
- 26년(서기 565) 봄 2월,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 가을 8월, 아찬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
-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경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서기 566년】
- 27년(서기 566) 2월, 기원(祇園)과 실제(實際) 두 절을 완공하였다.
- 왕자 동륜(銅輪)을 왕태자로 삼았다.
-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황룡사(皇龍寺)가 준공되었다.
【서기 567년】
- 28년(서기 567) 봄 3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서기 568년】
- 29년(서기 568),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다.
- 여름 6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서기 570년】
- 31년(서기 570) 여름 6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서기 571년】
- 32년(서기 571),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서기 572년】
- 33년(서기 572) 봄 정월,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 3월,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겨울 10월 20일, 전쟁에서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하여 왕성 밖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 만에 마쳤다.
【서기 574년】
- 35년(서기 574) 봄 3월,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 불상)을 주조하였다. 구리의 무게가 3만 5천 7근이었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만 1백 9십 8푼이었다.
【서기 575년】
- 36년(서기 575),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황룡사의 장륙상이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이 발꿈치에까지 이르렀다.
【서기 576년】
- 37년(서기 576)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 화랑의 전신)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사람들 여럿을 모아 함께 놀게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 천거하여 쓰고자 하였다. 마침내 두 미녀를 뽑았으니 하나는 남모(南毛), 하나는 준정(俊貞)이었다. 3백여 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무리들은 화목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잘생긴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짓고 그들을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김에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됨의 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어, 선량한 이를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겼다.”
최치원은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서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三敎)를 포괄하여 뭇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 공자)의 가르침이고,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함은 주나라 주사(柱史, 노자)의 뜻이며,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교화이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新羅國記)』에서 말하였다.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화장을 시키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높이 받들어 섬겼다.” -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서역의 중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鬘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 가을 8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임금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한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승명을 칭하다가 삶을 마쳤다. 왕비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살다가 돌아가시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