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미누스 트라쿠스 [Maximinus Tracus, AD. c.173~238] 로마 제국 제25대 황제(AD. 235~238)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Maximinus Tracus, AD. c.173~238] 로마 제국 제25대 황제(AD. 235~238)

로마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개인 정보】

  • [이름]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Gaius Julius Verus Maximinus “Thrax”)
  • [출생] 기원후 173년경, 트라키아
  • [사망] 기원후 238년 6월 24일 (그의 사망일은 정확하지 않다)
  • [재위 기간] 기원후 235년 3월 22일 ~ 238년 6월 24일
  • [전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AD. 208~235) :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AD. 222~235)
  • [후임] 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us I, AD. 159~238) :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 238)

【가족 관계】

  • [아버지] 미카(Micca)
  • [어머니] 아바바(Ababa)
  • [배우자] 카에킬리아 파울리나(Caecilia Paulina ?~235/236)
  • [아들] 카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Gaius Julius Verus Maximus, AD. 217/220~238)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는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그의 여동생 테오클리아(Theoclia)를 마키무스(Maximus)와 결혼시키는 것을 고려했으나, 그녀가 시아버지를 야만인(Barbarian)을 두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고 주장한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생애】

【출생과 가족 그리고 배경】

  • 그는 로마 역사에서는 ‘트라키아 사람 막시미누스’(Maximinus Trac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출신지가 트라키아 속주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양치기였다고만 알려져 있다.
  • 그는 군대에 입대하려고 하였는데, 로마 시민권이 없는 그는 군단병에 지원할 자격이 없었다.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인심 좋게 나누어준 카라칼라의 칙령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 그에게는 카에킬리아 파울리나(Caecilia Paulina)라는 아내와 카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Gaius Julius Verus Maximus)라는 자식이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 : 보조병에서 경호원으로】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였을 때, 그는 속주민에게 문호가 열려 있는 보조부대에 지원했지만 자격 연령인 17세에 한 살이 모자랐음에도 체격이 뛰어나 입대가 허용되었다.
  • 189년 황제 세베루스가 장남 카라칼라에 이어 차남 게타가 태어난 해였다. 둘째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세베루스가 순행하던 군단기지에서 무술 시합이 열렸다. 이때 막시미누스는 당당하게 세베루스 앞으로 나아가서 계급이 높은 병사들과 겨루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군율이 엄격하였기에 세베루스는 청을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규율을 어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막시미누스는 혼자서 16명을 차례로 쓰러뜨렸으며, 세베루스가 보조병들을 위해 준비해둔 상품을 모두 독차지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그의 실력을 한두 번 체크해 보고는 황제용 막사 경호원으로 발탁했다.

【카라칼라 황제 시절 : 백인대장】

  • 211년 카라칼라의 치세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38세로 군단병 80명을 지휘하는 백인대장으로 승진한 모양이니 로마 시민권을 얻었을 것이다.

【마크리누스 황제 시절 : 낙향】

  • 217년 카라칼라가 살해되고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취임했을 때 막시미누스는 은인의 아들을 죽인 사람 밑에서 싸울 수는 없다고 충성 서약도 거부하고 고향 트라키아로 돌아가 버렸다. 트라키아로 돌아간 막시미누스는 군대에서 모은 돈으로 농지를 사서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했다.

【엘라가발루스 황제 시절】

[엘라가발루스의 황당한 제안]

  • 마크리누스가 살해되고 카라칼라의 사촌누이의 아들인 엘라가발루스가 제위에 올랐다. 45세가 된 ‘트라키아인’은 수도 로마로 가고 있는 새 황제를 찾아갔다. 자기가 백인대장의 지위를 박차고 곁을 떠나지 않앟다면, 황제의 막사를 경호하는 일을 계속 맡고 있었다면 카라칼라 황제는 살해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막시미누스의 요청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세간의 평판에 따르면 너는 전에 열여섯 명, 스무 명, 아니 서른 명이나 되는 병사와 격투를 벌여도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던데, 그렇다면 한 여자와 서른 번을 계속해서 할 수 있겠느냐?”

[대대장으로 임명되다]

  • 막시미누스는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때 황제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엘라가발루스에게 충고하였고 대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후 4년동안 막시미누스는 황제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시절 : 신병훈련책임자】

  • 222년에 엘라가발루스도 살해되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제위에 올랐다. 소년 황제는 그를 맞아들였고, 신병 훈련 책임자로 임명했다.
  • 에드워드 기번은 막시미누스가 군단병들을 반란을 부추겼다고 언급한다.
    “이 트라키아의 농부는 알렉산데르 황제의 총애에 충성심으로 보답하는 대신 야심을 불태웠다. 그는 최고 권력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지위가 자신의 능력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지혜는 갖추지 못했지만 이기적이고 교활한 꾀는 있었던 그는 황제가 군대의 애정을 잃었음을 알아채고 그들의 불만을 부추겨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훌륭한 군주라해도 내분이나 중상모략으로 그의 통치에 독소를 퍼뜨리거나, 군주의 미덕을 약간의 유사점이 있는 악덕으로 교묘하게 변모시켜 비난하기는 매우 쉽다. 군대는 막시미누스가 보낸 밀정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병사들은 13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원로원의 하수인에 불과하고 소심하고 나약한 시리아인 황제 아래서 성가신 규율을 치욕스럽게 견디고 있었던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시민 정부라는 쓸데 없는 허상을 버리고, 병영에서 교육받고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면서 제국의 영광을 지키는 한편, 제국의 부는 동료들과 나눌 줄 아는 진정한 군인 황제를 선출해야 할 시기라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어느 날, 막시미누스가 연병장으로 들어서자 갑작스러운 충동이었는지 계획된 음모였는지는 모르지만 병사들이 그를 황제라 부르며 환영했다. 병사들은 고집스럽게 거절하는 그의 목소리를 커다란 함성으로 지워 버리고, 알렉산데르 황제를 살해함으로써 반란을 완성시키고자 서둘렀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군사원정】

  •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얻었지만 뒤에서는 막시미누스를 거리낌없이 ‘반(半)야만족’이라고 불렀다. 막시미누스는 자기한테는 제위를 정당화할 실적도 정통성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적을 쌓는 것을 수도 방문보다 우선하기로 했다.
  • 알렉산데르 황제가 살해된 235년부터 지체없이 시작된 게르만인과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필사적으로 싸우는 황제를 앞세워 각지에서 적극전법을 펴고 있었다.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에게 승전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그 승전보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 어쨌든 막시미누스는 3년간 승리를 거듭했다. 즉위 3년째인 238년에 막시미누스는 전선본부를 시르미움으로 옮겼다.

【막시미누스의 잔인성】

[경멸에 대한 두려움]

  • 그가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군단장도, 속주 총독도 경험하지 않았고, 당연히 원로원 의석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막시미누스의 잔인성은 경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신이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오만한 로마 귀족의 저택에서 무례한 노예들에게 문전박대 당했던 일들을 기억해 냈다.

[의심과 경계, 잔인성]

  • 음험하고 잔인했던 막시미누스는 특히 출신이 좋고 자질이 뛰어났던 신하들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음모에 대한 소문이 들어오면 그의 잔인성은 끝도 없이 무자비하게 발휘되었다. 집정관급 원로원 마그누스는 재판 없이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마그누스와 가상적인 공모자 4000명을 즉각 처형해 버렸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제국 전역은 밀정들과 밀고자들로 들끓었다.

【원로원,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다】

[농장주들이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다]

  • 황제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항의 운동이었다. 카르타고에서 세금을 징수하러 티스드루스(오늘날의 엘젬)에 파견된 황제 재무관에게 농장주들이 반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젊은 농장주들이 격분하여 몸싸움을 벌이다가 재무관을 죽여버렸다. 세금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항의가 공권력에 대한 봉기로 탈바꿈했다.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무장시켜 그들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몰려갔다. 속주 총독에게 재무관의 가혹한 과세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고르디아누스 총독이 임지의 사정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농장주들이 총독에게, 당신을 황제로 추대할테니까 수락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고,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다]

  • 고르디아누스는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원로원에게 보냈고, 평소 ‘트라키아 남자’를 혐오하고 있던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고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막시미아누스는 병사들에게 연설하고 원로원과 고르디아누스를 치기 위해서 로마로 행군하기 시작하였다.

[고르디아누스의 몰락, 원로원의 고민]

  • 이때 제3아우구스타 군단이 고르디아누스의 황제 옹립을 반발하여 카르타고로 공격해왔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2세가 전사했고, 고르디아누스는 자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당황했다. 막시미아누스에게 이미 국가의 적이라고 선포했기에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그들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옹립하여 막시미누스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군단 경험이 있는 푸피에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원로원은 수도 로마에 살고 있는 고르디아누스 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차기 황제의 칭호를 주었다.

[로마로 향하는 막시미누스]

  • 막시미누스는 자신이 야만족을 무찌르면서 국경을 지켰으니까, 자신과 병사들의 행군로 주변의 사람들이 숙소와 군량을 기꺼이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는 당장 필요한 식량만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한 원로원의 통고가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아퀼레이아 도시의 저항]

  • 아퀼레이아라는 도시가 막시미누스 황제 앞에 성문을 닫아버렸다. 과거의 막시미누스라면 아퀼레이아를 지나쳐 수도로 직진하는 전략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똘똘 뭉친 주민들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다. 점점 부하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 근처 알바노 땅에 기지가 있는 제2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은 처자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막시미누스의 허무한 죽음】

  • 막시미누스가 막사에서 자고 있을 때 제2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이 습격하였다. ‘트라키아 남자’의 목은 원로원에게 전달되어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후 도착한 푸피에누스 황제 앞에 막시미누스 휘하의 장병들과 아퀼레이아 주민은 충성을 맹세하였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