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누스 [Balbinus, AD. c.178~238] 로마 제국 제27대 황제(AD. 238)
【개인 정보】
- [이름] 데키무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Decimus Caelius Calvinus Balbinus)
- [출생] 기원후 178년경
- [사망] 기원후 238년 7월 29일, 이탈리아 로마
- [재위] 238년 4월 22일 ~ 7월 29일
- [공동 황제] 푸피에누스(Pupienus, AD. c.164~238) : 로마 제국 제27대 황제(AD. 238)
- [전임] 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us I, AD. 159~238) :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 238)
- [전임] 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us II, AD. c.192~238) :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 238)
- [후임]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us III, AD. 225~244) : 로마 제국 제28대 황제(AD. 238~244)
【가족 관계】
그의 아버지는 184년에 카파도키아 총독이었던 카일리우스 칼비누스의 아들이거나 입양된 아들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서기 13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일리우스 발비누스 비불리우스 피우스(Publius Coelius Balbinus Vibullius Pius)와 그 아내 아퀼리아(Aquilia)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발비누스의 생애】
【출생과 경력 쌓기】
- 발비누스는 기원전 178년경 출생하였다.
- 그는 또한 전쟁의 신 마르스를 섬기는 사이이(Salii) 사제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 그가 두 번의 집정관을 역임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첫 번째 집정관은 기원후 203년이거나 211년 7월로 추정되며, 두 번째 집정관은 213년에 황제 카라칼라와 함께 맡았는데, 이는 그가 카라칼라의 총애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 에드워드 기번은 발비누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74세 발비누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유명한 시인이었고, 로마 제국 대부분의 내부 속주들에서 공평무사한 행정을 펼쳐 존경을 받았던 현명한 행정관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재산도 많았고 성격은 온화했으며 베풀 줄도 알았다. 쾌락을 즐길 때도 품위를 잃지 않았고, 편안한 생활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업무 능력이 뒤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황제로 선출되다】
- 238년 아프리카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원로원이 승인하면서 당시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라인 강의 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였다. 동시에 고르디아누스의 황제를 반대하는 누미디아 총독이 고르디아누스를 공격하였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싸우다가 전사했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 원로원은 로마로 진격하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막기 위해서 두 명의 황제를 선출하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당시에 트라야누스 가문의 한 원로원 의원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고 기술했다.
“우리는 두 분의 훌륭한 황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공화국의 희망이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함께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의원들 가운데는 황제가 될 만한 덕성과 능력을 갖춘 분이 많습니다. 두 분의 황제를 선출해서 한 분은 외적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고 다른 한 분은 로마에서 민간 행정을 돌보도록 합시다. 제가 감히 지명을 해 본다면, 저는 기꺼이 막시무스(막시무스 푸리에누스) 의원과 발비누스 의원에게 표를 던지겠습니다. 의원 여러분, 저의 선택에 동의해주시든지 아니면 그 대신 자질이 더욱 뛰어난 분을 지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 결국 원로원은 푸리에누스와 발비누스를 황제로 선출하였다. 푸리에누스는 군사를 모아 막시미누스에게 대항하고, 로마에는 발비누스가 내치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때 고르디우스 가문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청으로 고르디우스 3세를 차기 황제로 선언하였다.
【푸피에누스와의 갈등】
- 푸피에누스가 트라쿠스를 상대하러 떠난 사이에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 치안과 공공질서를 관리하였는데 미숙한 운영으로 인해 안정화에 실패하고 그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하락하였다. 이때 푸피에누스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자 발비누스는 더더욱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가 로마로 돌아올 때 함께 데려온 게르만 군인들을 이용해서 자신을 제거할까 두려워했고, 푸피에누스는 형편없이 로마를 다스린 발비누스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점점 커져갔다.
- 이때 설상가상으로 원로원은 둘 중 한 명을 단독 황제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푸피에누스는 발비누스를 사치에 젖은 귀족이라 생각하여 경멸했고,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근본도 모르는 군인 출신이라고 무시했다.
【종말 : 근위대의 반란】
- 238년 7월 29일, 근위대의 병사들이 황궁으로 침입했는데, 그때까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근위대에 체포되어 끌려갔고,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 근위대는 서서히 잔인하게 고통을 주면서 이 불운한 황제들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게르마니아 출신 황제 근위병들이 황제를 구출하러 출동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들은 고문을 그치고 황제들을 수천번 난도질한 다음 대중의 모욕이나 동정을 받도록 그대로 길거리에 내버려 두었다.
- 시오노 나나미는 막시미누스를 죽이고 푸피에누스에게 항복한 군단이 두 명의 황제에 대해서 실망하고 두 황제를 제거했다고 기술하였다. 반면 에드워드 기번은 항복한 군단은 라인 강 전선으로 돌려보냈고, 애초에 막시미누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게르마니아 출신으로 모집한 병사들만 데리고 로마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게르마니아 병사들이 아니라 근위대의 병사들이 두 황제를 살해했다고 말한다.
- 푸피에누스는 근위대가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발비누스에게 경고하려고 했으나, 발비누스는 근위대가 자신을 황제로 추대할 것이라고 착각하여 그 경고를 무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