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 알렉산데르 [Severus Alexander, AD. 208~235]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AD. 222~235)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Severus Alexander, AD. 208~235] 로마 제국 제24대 황제(AD. 222~235)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개인 정보】

  • [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 [출생 이름]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Marcus Iulius Gesius Bassianus Alexsianus)
  • [출생] 기원후 208년 10월 1일, 알카 카이사리아
  • [사망] 기원후 235년 3월 19일, 게르마니아 모군티아쿰(마인츠)
  • [통치] 기원후 222년 3월 11일 ~ 235년 3월 19일
  • [전임]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AD. c.204~222) : 로마 제국 제23대 황제(AD. 218~222)
  • [후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Maximinus Tracus, AD. c.173~238) : 로마 제국 제25대 황제(AD. 235~238)

【가족 관계】

  • [아버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Marcianus) – 확실치 않음
  • [어머니] 율리아 아비타 마마에아(Julia Avita Mamaea)
  • [양아버지]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 [본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 [배우자]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Sallustia Orbiana)
    • [배우자] 술피키아 멤미아(Sulpicia Memmia)
  • [형제]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 [이복 누이] 테오클리아
  • [친동생] 바시아누스(Bassianus) : 일찍 사망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생애】

【출생과 가족】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208년 10월 1일 시리아의 소도시 알카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는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Marcianus)였고, 어머니는 율리아 아비타 마마에아(Julia Avita Mamaea)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는 율리아 마마에아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고 한다)
  • 그에게는 형으로 보이는(동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오늘날 레바논 티레 일대에서 신관으로 살았음)가 있었고, 이복 누나인 테오클리아, 그리고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친동생 바시아누스가 있었다.
  • 기원후 218년, 10살의 나이에 가족이 시련을 당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때 알렉산데르의 아버지, 이복 누이 부부가 엘라가발루스 옹립 움직임을 막기 위해 움직인 마크리누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황제로 승인받다】

[엘라가발루스의 양자가 되다]

  • 그의 어머니 마마에아는 엘라가발루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여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일찌감치 로마식 교육을 받게 하였다.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가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그의 외조모인 율리아 마이사는 후속대책에 골몰하였고, 그때의 해결책이 엘라가발루스를 파멸로 몰아넣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양자로 입적하여 카이사르(차기 황제)로 만든 것이었다.
  •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된 후, 그때까지 카이사르였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자연스럽게 황제로 선포되었다.

[원로원과 관계를 개선하다]

  • 황제가 된 뒤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였다. 이름 자체에서 세베루스나 카라칼라의 혈연을 강조하였고, 당시 로마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베루스의 혈연은 군대의 신임을 위한 것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는 것은 원로원의 호감을 위해서였다. 원로원은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알렉산데르의 즉위를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서둘러 승인을 하였다.
  • 알렉산데르는 미소년은 아니었지만 진지한 표정에 온화한 성품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황제 앞에서 의자에 앉는 것을 허용하였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로원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황제 혼자 결정한 정책은 잠정법으로 취급되어, 그 황제가 죽은 뒤에 자연히 폐지된다.

【조언자,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

[로마법 전문가 울피아누스]

  • 율리아 마이사는 외손자인 황제가 모든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상담역으로 로마법 전문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를 고용하였다. 로마는 법을 따로 가르치지 않고 실제 생활에서 배우고 익히게 하였다. 울피아누스는 황제와 원로원의 ‘2인 3각’ 통치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알렉산데르의 노력]

  • 알렉산데르는 군단의 기록을 틈만나면 외웠다고 한다. 장군과 이야기할 때 그 장군의 휘하 대대장의 이름을 금방 말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것은 장병들로 하여금 황제가 자신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고 믿는 효과가 있었다.

[공정하고 온전한 통치]

  • 알렉산데르 황제의 통치는 공정하고 온전했다. 그는 보수공사도 성실하게 하였으며, 네로가 만들었던 목욕장을 대규모 개조하여 ‘네로 알렉산데르 목욕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도에 식량을 보급하는 것을 정비하여 알렉산데르 치세 13년 동안 수도 로마는 식량 부족을 모르고 지냈다고 하다.
  • [사법상 최종결정권을 속주 총독에게 이양]
  • 알렉산데르는 사법상 최종결정권을 속주 총독에게 이양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기독교도 탄압에 이용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법이 만약 사도 바울 시대에 있었다면 바울은 로마행이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카라칼라가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시민권을 대폭 늘렸기 때문에 속주 총독에게 사법 결정권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시오노 나나미는 이쯤 되면 로마 시민권은 기득권이 아니라 취득권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취득권을 기득권으로 바꾼 것이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이었으며, 로마는 스스로 로마다움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황제의 결점, ‘마마보이’】

[황제의 후견인이 된 율리아 마마에아]

  • 그가 좋은 황제로서의 통치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것은 즉위한 지 4년이 지난 226년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사망부터였다. 율리아 마이사 대신 젊은 황제의 후견인이 된 것은 모후인 율리아 마메아였다. 율리아 마마에아는 자신이 진정한 최고권력자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황후인 살루스티아를 구박하고 이혼시켜 북아프리카로 추방시켰다.
  • 그녀가 잘못한 것은 아들이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도 미숙한 어린 시절과 똑같이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함으로서 그녀 자신과 아들인 황제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다.

[디오 카시우스의 파업]

  • 율리아 마마에아가 울피아누스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울피아누스의 반대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결국 울피아누스는 228년 자신의 부하인 근위대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로마사』라는 역사서를 기록한 디오 카시우스는 229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울피아누스의 죽음으로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지병을 이유로 나폴리 별장에 틀어박혀 지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에드워드 기번은 황제의 지나친 관대함이 근위대와 군대의 방종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제국의 위협 요소 :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

[신생국가 사산조 페르시아]

  • 알렉산데르 치세의 로마 제국을 불행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내부가 아니라 제국 외부의 정황이었다. 동방에서 파르티아 왕국이 멸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한 것이다.
  • 사산조 페르시아의 창시자인 아르다시스는 오랫동안 페르시아 민족을 지배한 파르티아 왕을 224년 전투에서 격파하고, 파르티아를 몰아냈다. 그런 다음 국내를 제압하는데 2년을 소비하고 226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다리우스가 지배한 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을 부흥하는 것이 목표였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페르시아의 로마 공격]

  • 신흥 국가는 국내의 반대파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라도 외부에 공격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페르시아군은 북쪽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 왕국을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방위선을 돌파하여 카파도키아 속주로 물밀듯 밀어닥쳤다. 서쪽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군대는 시리아 속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알렉산데르의 출정]

  • 알렉산데르는 몸소 출정하기로 결정한다. 232년, 제위에 오른지 10년 만인 24세에 비로소 황제로서 진가를 시험받게 되었다. 원래 황제라는 낱말의 어원은 ‘Imperator’다. ‘임페라토르’라는 라틴어 낱말은 원래 전투에 승리한 사령관에게 휘하의 병사들이 찬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외치는 호칭이다. 로마에서는 황제가 최고 사령관이었다.
  • 황제는 한 달만에 도나우 강에 도착하여 동방에 데려갈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6개 군단에 보조부대를 합하여 5만의 병력이었다. 이들 중에 주젼력인 군단병은 3만 정도였다. 황제는 군단병과 함께 행군하였다고 한다.

[나사가 빠져있는 군단들]

  •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황제를 맞이한 것은 나사가 빠져있는 군단이었다. 군율을 엄격하게 하려는 황제에게 오히려 분노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황제는 그 분노를 적을 위해 사용하라고 했지만,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해산해 버렸다. 일종의 파업을 선언한 것인데 다시 군단으로 복귀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어쨌든 233년의 페르시아 전쟁에 파업했던 병사들도 참전하였다고 한다.
  • 병사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새파랗게 젊은 사령관이 갑자기 나타나 격려하거나 보수를 약속하지 않고, 군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한 것에 화가 났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황제가 그들에게 ‘시민들이여’라고 말한 것 때문에 파업을 했다고 보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은 반성의 의미로 30일 동안 자숙하였고 황제의 공정성과 엄중함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승리의 보고서]

  • 233년 봄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처음으로 정면 충돌하였다. 233년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로마는 수세보다는 공세를 전략으로 삼았다. 피해는 있었지만 로마군이 승리한 것 같았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원로원에 자신이 승리했다고 보고했다.

【게르만 전선에서 생을 마감하다】

[게르만과 협상을 시도하다]

  • 원로원과 시민은 황제의 승리에 환호하고 흥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게르만에게 실력행사를 하기를 원했다. 234년 젊은 황제는 라인 전선으로 보내졌다. 먼저 234년 겨울 동안 황제는 게르만인과 외교교섭을 하였다. 황제는 게르만인에게 경제 원조를 제안하고, 그것으로 게르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병사들의 불만, 반란]

  • 마인츠 일대에 집결해 있던 장병들은 그러한 황제에 대해 불만이 생겼다. 235년 3월, 병사들이 봉기하여 황제를 죽였고, 전선에 동행했던 율리아 마메아도 살해하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알렉산데르 황제의 마지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알렉산데르 황제는 피할 수 없는 칼날을 남자답게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소용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애원함으로써 마지막 순간을 치욕스럽게 만들었고, 그의 결백과 비운이 응당 불러일으킬 만한 일말의 동정심 마저도 경멸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어머니 마마이아의 오만과 탐욕이 파멸의 원인이라고 소리 높여 비난했는데, 그 어머니 역시 아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새로운 황제, 막시미누스]

  • 장교들은 쾰른에서 신병 훈련을 지도하고 있던 막시미누스 장군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막시미누스가 병사들의 불만을 부추겼다고 보았다) 이후부터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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