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켄니우스 니게르 [Pescennius Niger, AD. c.135~194] 황제참칭자(AD. 193~194)
【개인 정보】
- [이름]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
- [출생] 기원후 135년경 혹은 140년경, 이탈리아
- [사망] 194년 5/10월경, 안티오키아
- [황제 참칭] 기원후 193년 4월말 ~194년 5/10월
【가족 관계】
- [아버지] 안니우스 푸스쿠스(Annius Fuscus)
- [어머니] 람프리디아(Lampridia)
- [형제] 푸블리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ublius Pescennius Niger) : 서기 183년에 아르발 형제단(Arval Brethren)의 일원이었다.
- 과거 일부 역사학자들은 “Pescennia Plautiana Augusta”라는 문구가 새겨진 메달을 근거로, 니게르(Niger)가 플라우티아나(Plautiana)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거나 페센니아 플라우티아나(Pescennia Plautiana)라는 딸이 있었다고 추정했지만, 해당 메달은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생애】
【출생과 가족】
- 그는 기원후 135년경 혹은 140년경 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생지는 이탈리아 반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니게르의 부모는 안니우스 푸스쿠스(Annius Fuscus)와 람프리디아(Lampridia)였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는 아퀴눔(Aquinum)의 감독관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그에게는 푸블리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ublius Pescennius Niger)라는 이름의 형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형제는 서기 183년, 코모두스 황제 통치 시기에 ‘아르발 형제단(Arval Brethren)’의 일원이었음을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검은”을 뜻하는 니게르라는 별칭은, 아버지 안니우스 푸스쿠스의 코그노멘이 ‘푸스쿠스(갈색)’인 것과 마찬가지로 페스켄니우스의 신체적 특징으로 얻게 됐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얼굴이 붉고 구릿빛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몸이 하얗고 살집이 있어 뚱뚱했음에도 목덜미가 남들보다 검은 까닭에, 이 별명을 얻게 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
- 마흔 살이 넘었을 무렵 두각을 나타냈다. 이집트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단의 ‘프로쿠라토르’에 임명된 것이다. 프로쿠라토르는 전투 지휘를 제외한 군단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리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을 뒤처리하기 위해 이집트를 방문한 마르쿠스 황제의 눈에 띄었다.
- 니게르는 마르쿠스 황제의 추천으로 원로원에 들어갔지만, 그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사람은 마르쿠스의 오른팔인 폼페이아누스였던 모양이다. 그후의 경력을 보아도, 니게르를 지도층에 편입시킨 것은 엘리트로 키우기 위해서였다기보다 변경에 근무할 군단장이나 총독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보아야한다.
【콤모두스 황제 시대】
- 니게르가 실제로 등용된 것은 마르쿠스 황제가 죽은 직후였는데, 아마도 폼페이아누스를 존경했던 콤모두스가 아버지의 오른팔인 폼페이아누스의 진언을 받아들여 니게르를 등용했다는 가설은 충분한 타당성을 갖는다. 그후 니게르의 임지는 모두 황제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변경의 속주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치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니게르는 그러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원로원에 들어간 니게르는 40대 후반에 ‘보결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군단의 지휘 자격을 얻은 니게르는 콤모두스 황제의 명으로 최전선인 다키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다. 다키아는 군사적인 방위와 함께, 로마 영토로 이주하기를 바라며 호시탐탐 남하를 노리고 있는 북방 야만족의 요구도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어야 했다. 게다가 주민은 게르만계가 압도적으로 많다. 니게르는 이곳에서 5년 가까이 총독을 지냈다.
【시리아 속주 총독】
- 188년에 니게르는 로마군 탈영병으로 조직된 강도단이 갈리아를 분탕질하고 다녔는데, 군단이 주둔하지 않은 갈리아의 치안을 회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강도단을 진압하는 데 2년이 걸렸지만, 그 공을 인정받아 니게르는 동방 방위선의 핵심인 시리아 속주로 보내졌다. 시리아 속주 총독이 지휘하는 병력은 시리아에만 3개 군단에 이른다.
- 파르티아는 항상 로마 제국의 가상의 적국이었지만, 니게르는 파르티아 왕국을 존속시키는 것이 로마에 더 유리하다는 방침에 따라 파르티아와 로마라는 두 강대국의 공생 노선을 추진했다. 니게르가 택한 노선은 국내에서 페르시아계가 대두하여 골치를 앓고 있던 파르티아에게는 좋은 상황이었기에 파르티아 왕실에 니게르 지지자가 생길 정도였다. 니게르는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맡고 있던 중소 왕국이나 호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니게르는 군단병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 앉아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군단 기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과 끊임없이 교류했다. 그리고 동방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속주의 총독이면서도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193년, 황제로 추대되다】
- 니게르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콤모두스와 페르티낙스가 차례로 살해되고 로마 제국이 내란 시대로 접어들었다. 니게르도 안티오키아에서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아 193년 4월 13일, 황제를 자칭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주의 사람들에게 떠밀린 것 같다.
- 난세에 성공률이 높은 것은 스스로 강렬하게 원해서 나선 사람이다. 강한 의욕이 있으니까 목표 설정도 명확하고, 그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을 선택할 때도 진지하다. 반대로 주위의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선 경우에는 목표도 막연하고 수단을 선택할 때도 우유부단해서 모든 게 어정쩡해지기 쉽다. 실제로 황제를 자칭한 뒤의 니게르는 무엇보다 행동이 굼떴다. 그리고 행동을 개시한 뒤에도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 않고 계속 머뭇거렸다.
-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니게르를 제1인자보다는 2인자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황제로 추대된 이후 헛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없이 했고, 약속도 밥먹듯이 깨버렸다. 처음에는 니게르나 알비누스에게 ‘영혼의 파트너’로 제국을 함께 다스리자는 감언이설을 서슴없이 하면서 뒤로는 암살을 모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다】
[니게르의 선제 공격, 페린투스 전투]
- 니게르는 카파도키아의 2개 군단, 시리아의 3개 군단,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3개 군단, 이집트의 1개 군단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이 병력을 다 동원할 수 있었다. 파르티아 왕국도 호의적인 중립을 약속하였고, 아르메니아 왕국은 병력을 제공해 준다는 제의까지 한 상황이었다.
-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니게르가 위와 같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하지만, 다른 사료들에서는 객관적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니게르보다 월등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 193년 말에 페린투스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는 니게르 군대가 승리했다. 승리한 니게르는 세베루스에게 공동 황제가 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세베루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전투는 아마도 니게르가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반격, 키지쿠스 전투]
- 세베루스는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칸디두스를 먼저 보내 니게르에게 맞서게 하였다. 니게르는 비잔티움을 본부로 삼고, 마르마라해 남쪽 해안을 방어하도록 아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임무를 맡겼다. 칸디두스는 키지쿠스(Cyzicus)에서 아이밀리아누스와 전투를 벌여 니게르의 군대를 무찔렀고, 아이밀리아누스는 포로가 되어 처형당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니케아 전투에서 승리하다]
- 이후 비잔티움이 포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니게르는 니케아로 후퇴하였다. (비잔티움은 여전히 니게르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세베루스는 니게르가 죽은 이후인 195년 말에 이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 193년 12월말, 니케아 외곽에서 니게르는 다시 패하였으나, 주력부대는 무사히 철수시켜 안티오크로 돌아갔다. 이러한 패배로 인해서 소아시아에서 니게르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라오디케이아와 티레를 비롯한 일부 도시들이 세베루스로 충성을 돌렸으며, 194년 2월 13일에는 이집트가 세베루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아라비아 속주의 제국 총독도 세베루스 측으로 돌아섰다.
[이수스 평원 결전에서 패배하다]
- 세베루스는 칸디두스를 다른 장군인 푸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로 교체했고, 194년 5월, 이수스 평원에서 결전을 벌였다. 최종 승리는 목표의식이 뚜렷했던 세베루스의 승리가 되었다. 세베루스는 항복한 적을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형세가 조금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때 그것은 동방의 군대에게 공포심으로 작용했고 니게르 쪽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 니게르도 후퇴하여 파르티아로 망명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추격하는 세베루스의 추격대가 니게르를 따라잡았다. 니게르는 붙잡히기보다는 싸우다 죽은 것을 택하였다고 한다. 한편 비잔티움 도시는 니게르가 죽은 뒤에도 니게르에게 충성을 바쳐서 세베루스의 부대에 저항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