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 [穆宗, AD. 980~1009] 고려의 제7대 국왕(재위 : 997~1009)

목종 [穆宗, AD. 980~1009] 고려의 제7대 국왕(재위 : 997~1009)

이름은 왕송(王誦),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효신(孝伸)이다. 경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천추전에서 머물러서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린다〕 황보씨(皇甫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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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후 즉위까지】

【기원후 980년】 출생하다

  • 5월 20일(음력) 경종과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기원후 981년】 아버지 경종이 승하하다

  • 7월 11일(음력) 아버지인 경종이 승하하였다. 이때 겨우 2세였기 때문에 당숙인 성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성종은 목종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기원후 990년】 개령군으로 책봉되다

  •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하였다.

【고려 제7대 국왕】

【기원후 997년】 왕으로 즉위하다

  • 997년 10월 27일(음력) 1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 즉위 첫해 12월에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軍人田柴科)를 개정하였다.
  • 재위(997~1009) 기간에 총 네 차례에 걸쳐 서경에 행차하였으며, 지방 순행을 하기도 하였다.
  • 목종은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며 임금의 도량이 있었다.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며 사냥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뜻이 없었으며, 측근만을 가까이하였다는 유교적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김치양(金致陽) 등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후사가 없던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천추태후는 태조의 손자로 왕위 계승이 가능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고, 국왕의 원찰(願刹)인 숭경사(崇敬寺)에 보냈다. 이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거처하는 대량원군을 여러 차례 살해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유행간(庾行簡)을 사랑하여 동성애(龍陽)를 하고 남색(男色) 관계를 맺었는데, 유행간은 왕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문무백관을 마음대로 부려 신하들이 유행간을 왕을 대하듯이 하였다.

【기원후 998년】 전시과 개정, 서경을 호경으로 바꾸다

  • 998년(목종 2년), 목종은 경종 때에 제정된 관리들의 보수 지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 998년(목종 2년) 7월, 북진정책의 거점지이자 제2의 수도인 서경(西京)의 이름을 호경(鎬京)으로 바꾸었다.

【기원후 999년】 호경(서경)에 행차하다

  • 999년(목종 3년) 10월에는 호경에 직접 행차하여 지역민들에게 각종 은전을 베풀었다. 이후에도 수차례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서경을 중시하였다.

【기원후 1000년】 덕주에 성을 쌓다

  • 1000년(목종 3년), 덕주(德州)에 성을 쌓았다.

【기원후 1001년】 성을 쌓고, 중원부에 행차하다

  • 1001년(목종 4년), 영풍진(永豐鎭), 평로진(平虜鎭)에 성을 쌓았다.
  • 1001년(목종 4년) 11월, 중원부(中原府)에 행차하여 풍속을 순시하였다. 왕이 지나간 주현(州縣)의 전조(田租)를 1년 동안 감해 주었다. 또한 행차가 지나가는 과정에서 왕의 행차를 접대한 주와 현의 전조를 절반으로 줄였다.

【기원후 1002년】 토목공사에 대해 위무, 격려하다

  • 1002년(목종 5년) 5월, 목종은 교서를 내려 토목공사를 일으켜 군인과 역부에게 노역을 시킨일과 불교 사원을 짓게 하는 등 국가를 방만하게 경영한 탓이 본인에게 있음을 말하며 스스로 반성하고 군사들을 위무하며 격려하였다.

【기원후 1003년】 서경을 중시하고 여진에 대비하여 성을 쌓다

  • 또한, 1003년 개경, 서경, 동경과 10도의 학생 가운데 천거를 받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서경을 중시하고 지역세력과 관계를 가지며, 이를 등용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북방 지역인 함경남도 안변(安邊), 평안북도 귀성(龜城), 함경남도 정평(定平) 등에 성을 쌓아 여진에 대비하였다.

【기원후 1004년】 과거시행법을 정비하다

  • 1004년(목종 7) 과거시행법을 정비하여, 3월에 3일 동안 시험을 보고 1주일 후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기원후 1005년】 동여진의 침략을 막고, 성을 쌓다

  • 1005년(목종 8년), 동여진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장수를 보내어 이를 막았으며 진명현(鎭溟縣), 금양현(金壤縣), 곽주(郭州)에 성을 쌓았다.

【기원후 1006년】, 성을 쌓고, 흉년이 들자 공부를 면제하다

  • 1006년(목종 9년), 용진진(龍津鎭), 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 1006년(목종 9년), 흉년이 들자 미납된 공부를 면제해 주었다.

【기원후 1007년】 진관사 9층탑을 세우고, 성을 쌓다

  • 승려들을 우대하고 진관사(眞觀寺)를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으며 이후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하여 왕의 원찰로 삼았다. 1007년(목종 10년) 9월에는 진관사에 9층탑을 세웠다.
  • 1007년(목종 10년), 흥화진(興化鎭), 울진(蔚珍), 익령현(翼嶺縣)에 성을 쌓았다.

【기원후 1008년】 성을 쌓다

  • 1008년(목종 11년), 통주(通州), 등주(登州)에 성을 쌓았다.

【기원후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 시해되다

  • 1009년(목종 12) 정월 대부(大府)의 기름창고에서 화재가 나서 천추전에 옮겨붙어 불타버렸다. 목종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병이 났다. 그는 김치양의 모의를 알고, 재신(宰臣) 최항(崔沆)ㆍ채충순(蔡忠順) 등에게 대량원군을 자신의 후사로 영립(迎立)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서북면 도순검사주3(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입위(入衛)를 명하였다. 강조는 무장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현종이다.
  • 또한, 강조는 김치양과 아들,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세력 등과 함께 유배를 보냈다. 목종은 강조에게 폐위를 당한 후에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향하다가 파주시 적성(積城)에서 강조가 보낸 사람들에게 시해되었다(음력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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