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成宗, AD. 960~997] 고려의 제6대 국왕(재위 : 981~997)

성종 [成宗, AD. 960~997] 고려의 제6대 국왕(재위 : 981~997)

재위 981년~997년. 이름은 왕치(王治), 자(字)는 온고(溫古). 할아버지는 태조(太祖)이고, 아버지는 대종(戴宗) 왕욱(王旭)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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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후 즉위 이전까지】

【기원후 960년】 출생하다

  • 960년 12월 26일(음력)에 태조 왕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태후 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원후 969년】 부친 대종을 여의다

  • 아버지 대종을 여의고 개령군(開寧君)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마저 여의게 되자 성종과 형제들은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다.

【즉위 이후】

【기원후 981년】 즉위하다

  • 981년(경종 6) 경종(景宗)의 내선(內禪)으로 왕위에 올랐다.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왕송(王訟, 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성종은 조카 목종을 개령군(開寧君)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
  • 즉위 직후 충과 효로서 다스리겠다며 유교적 통치를 선언하였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 선경대왕으로 추존하고, 모후를 선의왕후로 추존한 뒤 종묘에 합사하였다. 이후 태조의 기일 전후 5일,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의 기일 전후로 3일간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도살장에서의 도살을 금하고 경건하게 보냈다. 호족들 중에는 불교 정책에 반하는 점과 그가 대종의 아들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원후 982년】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리다

  • 982년(성종 1) 6월에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에 정광(正匡) 행선관어사(行選官御史) 상주국(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기원후 983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다

  • 먼저 지방제도의 정비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983년(성종 2)에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지방관의 설치는 고려 건국 이래 처음 있었던 일로써,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12목의 설치와 함께 금유(今有)· 조장(租藏)은 혁파되었다. 12목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하였으며, 가족의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 이와 같은 지방 행정의 정비ㆍ강화는 지방세력 통제책과 관계가 있었다. 우선 12목이 설치되던 983년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이직(吏職)을 개편하였다. 이후에도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책은 여러 가지 형태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기원후 986년】 12목에 처자를 데리고 부임하는 제도

  • 그러나 986년(성종 5) 12목에 처음으로 처자(妻子)를 데리고 부임하게 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이루어졌다.

【기원후 987년】 지방 교육

  • 이듬해에는 12목사(牧使)와 경학박사(經學博士)ㆍ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씩을 뽑아 보내어 지방 교육을 맡아보게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醫術)이 있는 사람을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다.

【기원후 992년】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사건, 교육 장려

  • 성종의 두 누이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고종 사촌인 헌숙왕후는 호족을 견제하려던 백부 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광종의 태자 경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경종은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개령군 송을 낳았고, 헌정왕후와의 사이에는 소생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는 궁궐에서 살았고, 헌정왕후는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이웃에 살던 이복 숙부 안종(왕욱)과 정을 통하였고,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왕욱의 집 가노는 집에 방화를 하여 왕과 대신들이 오게 한다. 이때 임신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자 성종은 안종을 사수현(현재 사천시)으로 유배보내고 그녀는 안종의 유배 가는 길을 배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껴 아들인 대량원군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수태 중 왕욱의 사저에 있다가 발각되어, 부끄러워 울며 도망가다가 출산하고 죽었다고 한다.
  • 한편 헌애왕후 역시 김치양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김치양을 만나 자주 교류하다가 사통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켰다. 성종은 김치양을 처형하려 했으나 헌애왕후의 부탁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는 대대적으로 실추되었다.
  • 992년(성종 11)에 교(敎)를 내리기를, “학문을 많이 쌓지 아니하면 선(善)을 알 수 없으며, 어진 이를 임용하지 아니하면 공을 이룰 수 없다. 이로써 서울에는 학교를 열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지방에는 학교를 설치해 생도를 가르치며, 문예를 경쟁하는 장소를 열고,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업을 넓혔으나, 오히려 포부를 가진 뛰어난 선비를 얻지 못했으니 어진 이를 가로막고 재능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지 어찌 알리요. 무릇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이 있는 자는 대궐에 나와서 자천(自薦)함을 허락한다.”라고 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교를 내려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고, 그 덕행(德行)과 재능은 성명 밑에 기록해 아뢰어라.”라고 한 것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 또한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정하였으며, 태학(太學)에 재물을 넉넉하게 하여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로써 어진 사람을 구하였다. 그리고 수령을 독려해 백성을 구휼하고, 효도와 절의를 권장해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등, 정치ㆍ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책을 정력적으로 편 결과 새로운 고려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원후 993년】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외교담판, 상평창 설치

  •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서희(徐熙)의 외교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강동 6주(江東六州)를 얻어 영토를 넓혔다.
  • 밖으로는 993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택하고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북ㆍ서북 지방에 특히 유의했다.
  • 993년(성종 12)에는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다. 또한 지방 각 관청의 경비 지출을 위한 공해전시(公廨田柴)의 법을 정비하는 등 지방 행정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기원후 995년】 지방 관제 개편

  • 995년(성종 14)의 지방관제 개편은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 995년의 개편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10도제(道制)의 실시이다. 당(唐)의 10도제를 모방해 제정한 것으로 생각되는 10도제는, 곧 그 실시과정에서 유명무실해졌으나, 우리나라 도제(道制)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절도사(節度使) 체제로의 개편이었다. 즉, 종래의 12목을 12절도사로 개편한 것은 군정적인 지방행정을 통해 지방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통제함으로써 완전한 중앙집권을 꾀하려한 조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성종의 치적으로서 특히 주목할 것은 삼성(三省) 체제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비였다. 이 개혁은 이미 98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태조 이래의 정치기구를 중국식 제도로 개편한 것이다. 우선 982년부터 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기구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 병관(兵官)· 민관(民官)· 형관(刑官)· 예관(禮官)· 공관(工官)의 6관(六官)이 예속되어 있었다. 왕명 출납과 궁궐 숙위를 담당한 중추원(中樞院), 감찰 업무를 담당한 어사대(御史臺) 등도 설치되었다. 이와 같은 중앙 관제는 995년에 다시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 관제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기원후 997년】 조카인 개령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 997년(성종 16) 10월에 병이 위독해지자 조카인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 목종[穆宗])에게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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