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肅宗, AD. 1054~1105] 고려의 제15대 국왕(재위 : 1095~1105)

숙종 [肅宗, 1054~1105] 고려의 제15대 국왕(1095~1105)

숙종(肅宗, 1054~1105)은 고려의 제15대 국왕(1095~1105)으로 초명(初名)은 왕희(王熙), 이름은 왕옹(王顒)이다. 문종(文宗)의 3남이며 순종(順宗)ㆍ선종(宣宗)의 동모제(同母弟)이다. 비(妃)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이다.

☞ 숙종의 ‘개인 정보’와 ‘가족 관계’ 바로가기


【출생부터 즉위 이전까지】

【기원후 1054년】 출생하다

  • 7월 28일(음력),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 그는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기원후 1095년 이전】 계림공에 책봉되다

  •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 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책봉되었다.

【즉위 이후 말년까지】

【기원후 1095년】 제위를 찬탈하여 즉위하다

  •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제위를 찬탈하여 1095년에 즉위하였다.

【기원후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다

  •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다.

【기원후 1097년】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다

  •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다.

【기원후 1099년】 남경개창도감을 두다

  •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성하였다.

【기원후 1101년】 고주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를 만들다

  •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활구(闊口)를 주조하였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 1만 5000관을 만들어 문무백관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기원후 1102년】 서경에 기자사를 세우다

  •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 라고 숙종에게 아뢰자 숙종은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기원후 1103년】 동여진의 변화

  • 1102년과 1103년에는 동여진의 태사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영가가 죽고 오아속(烏雅束)이 태사가 된다.

【기원후 1104년】 윤관이 여진 정벌을 계획하다

  • 오아속이 태사가 되고 1104년 1월, 동여진의 내분을 진압하기 위해 오아속의 기병이 정주 관문 앞까지 진군해 왔다.
  • 같은 해 2월에 임간(林幹)이 관문 밖으로 나가 여진군을 공격했다가 패하였다.
  • 3월에는 윤관이 여진 정벌을 계획하였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과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 도합 30만명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기원후 1105년】 병으로 붕어하다

  •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장평문 밖 수레 안(御輦)에서 붕어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