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毅宗, AD. 1127~1173] 고려의 제18대 국왕(재위 : 1146~1170)
의종(毅宗, 1127~1173)은 고려의 제18대 국왕(1146~1170)으로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맏아들이다.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썼으나 끝내 정변으로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났고 마지막에는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에게 살해당했다.
【출생부터 즉위 이전까지】
【기원후 1127년】 출생하다
- 4월 11일(음력) 인종과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 아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
- 인종은 그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어머니는 그보다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유난히 좋아해 그를 태자로 앉히려고 했지만 정습명의 강력한 지원으로 그러지는 못했다.
【기원후 1134년】 태자가 되다
- 1134년(인종 12)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했다.
【즉위 이후 무신의 난, 폐위, 살해】
【기원후 1146년】 인종이 죽고 즉위하다
-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했다.
- 즉위한 뒤에 그는 아버지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으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 더욱이 재위 초반에는 몇몇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연계해 국가전복을 꾀하려다 사전에 들통나 처벌받는 등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무신들을 등용해 친위군을 강화해 나갔다.
-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기원후 1148년】 경쟁자 왕경을 대령후로 봉하다
- 1148년 11월에 경쟁자였던 동생 왕경을 대령후(大寧侯)로 봉하고, 대령부(大寧府)를 설치해주었다.
【기원후 1154년】 서경에 중흥사를 중창하다
-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중창하였다.
【기원후 1157년】 경쟁자 대령후를 유배보내다
- 재위 중반에는 자신의 경쟁자이자 동생인 대령후를 유배라는 형식으로 숙청한다.
【기원후 1158년】 별궁을 창건해 중흥이라 명하다
- 1158년에는 백주(白州: 현, 황해도 연백군 지역)에 별궁(別宮)을 창건해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하였다.
【기원후 1170년】 신령 반포, 무신정변, 폐위되다
- 1170년(의종 24)에 서경(西京)에 거둥(擧動)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정하는 것은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함이며, 이에 옛 성인들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을 받들어 현재의 민폐를 구제할 수 있는 일을 채택해 반포한다고 하였다.
- 1170년 음력 8월 30일 보현원에 거동했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음력 9월 2일 무신들에게 폐위당해 3년간 거제도의 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
- 의종과 태자, 태손이 모두 없어진 그 날 의종의 셋째 동생 익양공 왕호가 무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본궐의 제2정전 대관전에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명종이다.
【기원후 1173년】 김보당의 봉기, 이의민에게 살해되다
-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시고 경주로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진압되었다.
- 1173년, 의종은 자신이 발탁했던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그가 의종을 끌어안고서는 등뼈를 꺾어버린다. 그리고 온 몸의 마디, 관절을 부러뜨려 버리고 의종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시체는 그대로 동경 (오늘날 경주)의 한 연못에 수장당하고 만다.
-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아우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