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기에르 [Barthélemy Bruguiére, 1792~1835]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Barthélemy Bruguiére, 1792~1835]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는(1792~1835)는 프랑스 출신으로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 선교를 위해 북경주교와 교황에게 탄원서를 올렸고 1831년 조선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출생 이후 초대 조선 대목구장 임명까지]

【1792년】 출생하다

  • 2월 12일, 프랑스 프랑스 서남부 레삭(Raissac d’Aude) 마을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 카르카손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15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816년】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 1816년부터 1825년까지 모교인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다.

【182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다

  • 아시아 선교를 갈망한 나머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다.
  • 아시아 선교를 결심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부쳤다. “제가 여러 해 전부터 결심한 것은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도 아니며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도 아닙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부족한 제가 양심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1825년 9월 8일자 서한)

【1826년】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

  •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6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있을 때,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조선 교우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베이징으로 교우 대표를 보내어 성직자를 요청했지만 늘 성과가 없었다”며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이라며 조선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1827년】 방콕 본당 사목, 신학생 교육

  • “일본사람들처럼 조선인들도 쾌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이 강하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신앙심이 요지부동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저 불쌍한 조선 교우들을 돌볼 사제가 온 유럽에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1827년 2월 4일 페낭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
  • 1827년 6월 4일 샴 수도 방콕에 도착한 그는 교구청 일과 방콕 본당 사목에 힘쓰는 한편 20명 남짓한 신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1828년】 시암 부주교, 캅수스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다

  • 플로랑스(Florens) 주교가 반복적으로 후임자를 요청한 끝에, 1828년 2월 5일 교황 레오 12세(Pope Leo XII)에 의해 시암(Siam)의 부주교(coadjutor vicar apostolic) 및 캅수스(Capsus)의 명의 주교(titular bishop)로 임명되었다.

【1829년】 조선 선교를 자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시암 대목구장 주교

  • 1829년 6월 9일, 조선 선교를 자청하는 편지를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으로 보냈다.
  • 1829년 6월 29일 시암의 대목구장(vicar apostolic)인 에스프리-마리-조제프 플로랑스(Esprit-Marie-Joseph Florens) 주교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1831년】 페낭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다

  • 1831년에 페낭(Penang)으로 이동하여 MEP(파리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종합 신학교에서 자크-오노레 샤스탕(Jacques-Honoré Chastan), 장-바티스트 부쇼(Jean-Baptiste Boucho), 장 피에르 바르브(Jean Pierre Barbe), 로랑-조제프-마리우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등과 함께 가르쳤다.
  • 1831년 9월 9일, 브뤼기에르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임명 이후 사망까지]

【1832년】 페낭을 출발해 조선으로 향하다

  • 교황이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한 소식을 1832년 7월 25일에야 전해 들었다.
  •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항해 싱가포르, 마닐라, 마카오, 중국 푸저우ㆍ난징을 거쳐 1834년 10월 8일 중국 허베이성의 시완쯔(西灣子) 교우촌에 이르러 한 해를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에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필리베르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을 만났다.
  •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위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1832년 11월 18일 마카오에서 보낸 서한)

【1835년】 조선 입국 전에 세상을 떠나다

  • 1835년, 조선에 가기 위해 다시 채비를 마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할 결심을 하고 10월 7일 시완쯔(西灣子) 교우촌을 떠났다. 12일 만인 10월 19일 마자쯔(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고된 여정을 버티지 못하고 교우촌에 도착한 지 하루 만인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 1835년, 그는 싱가포르에서 마닐라로, 이어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복건성과 산서성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 내 기독교 박해와 조선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그는 먼저 충리구(崇礼区)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 피신하였다.
  • 1835년 10월 7일, 두 사람은 조선으로 향해 출발하였으나, 브루기에는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병에 걸려 같은 해 10월 20일 사망하였다
  • 그의 <만주 여행기>는 달레가 쓴 <조선 교회사>라는 책 속에 실려 있다.
  • 그의 유해는 그의 후임이자 같이 조선으로 파견된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일단 그가 죽은 열하성 뻬리쿠에 묻혔으며, 1931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아 용산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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