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베르 [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7~1839]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1797~1839)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2대 교구장으로 한국식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며 세례명은 ‘라우렌시오’이다.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출생 이후 사제 서품 이전까지]
【1797년】 출생과 어린시절
-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난(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é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앵베르는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것을 배웠으며, 얼마 뒤에는 카브리에 본당의 아르노(Arnaud) 신부와 생활하게 되었다.
【1807년】 성 요아킴 기숙학교에 들어가다
- 1807년경 그리스도교 은수회에서 운영하는 성 요아킴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1812년】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다
- 1812년에는 액스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 앵베르는 신학 공부를 마쳤을 때에도 나이가 어려 차부제품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2년 동안 가정 교사를 하는 등 시간을 보냈다.
【1818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다
- 1818년 10월 8일에 그벨(Aiguebelle)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원장에 의해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내졌다.
[사제 서품 이후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임명 이전까지]
【1819년】 사제로 서품받고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다
- 3월 27일에 차부제품을 받고, 이어 연령 제한에 대한 특별 관면을 받은 뒤, 그해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 사제 서품 후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20년】 파리를 떠나 선교지로 향하다
- 앵베르 신부는 1820년 3월 20일 파리를 떠났다.
【1821년】 페낭 신학교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다
- 1821년 3월 19일 페낭에 도착하였다.
- 그는 페낭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1822년】 마카오, 코친차이나, 통킹
- 2월 10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이어 코친차이나로 가서 5~6개월 동안 머물렀고, 다시 통킹으로 가서 2년 이상 머물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1825년】 사천에 도착하다, 티벳 국경의 모펭에 신학교 세우다
- 1825년 3월에 중국의 운남성(雲南省)을 거쳐 목적지인 사천에 도착하였다.
- 앵베르 신부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활동하는 가운데, 티벳 국경의 모팽(Moping)에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1831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 앵베르 신부는 사천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 소식을 듣고, 1831년 파리 본부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1833년】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대표부에 조선 선교의 뜻을 전하다
- 1833년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대표부에 여러 번 (조선 선교에 대한)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으나, 그의 지원은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36년】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하자, 포교성성에서는 1836년 4월 26일 앵베르 신부를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임명 이후 순교 이전까지]
【1937년】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다, 조선에 입국하다
- 앵베르 주교는 교황청의 칙서를 1년이 지난 1837년 4월 초에야 받았고, 같은 무렵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 앵베르 주교는 갑사 주교의 명의로 5월 14일 사천 대목구장 퐁타나(Fontana) 주교에 의해 성성됨으로써,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 성성식을 마친 앵베르 주교는 8월 16일 사천을 떠나 10월 말경 달단의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고, 다시 북경ㆍ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해 12월 4일 봉천(奉天)에 이르렀다.
- 봉천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앵베르 주교는 12월 16일 봉황성의 변문(邊門)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ㆍ조신철(趙信喆, 가롤로)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12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 이로써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가 되었으며, 조선 교회는 창설 53년 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1938년】 조선에서 전교활동에 힘쓰다
- 입국 후 서울 후동(后洞)의 정하상 집에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운 앵베르 주교는 3개월 후에는 우리말로 고해성사를 줄 수 있게 되었고, 5월부터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 그는 서울과 경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모방(Maubant, 羅) 신부ㆍ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1836년 초 6,000명이던 신자 수는 1838년 말 9,000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 앵베르 주교는 일상적인 사목 활동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심을 함양하고 방인 사제를 양성하는 등 조선 교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먼저 한국어로 된 기도서가 없는 것을 알고 한국어 기도서의 편찬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4명의 통역들을 데리고 기도문 번역에 착수하여 1838년경 《텬주 성교 공과》(天主聖教 功課)와 《텬주 성교 십이단》(天主聖敎十二端)을 완성하였다.
- 그는 또 모방 신부ㆍ샤스탕 신부와 함께 매괴회(玫瑰會)ㆍ성의회(聖衣會) 등 신심 단체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洗)를 주는, 일종의 성영회(聖嬰會) 활동도 전개하였다.
- 이와 함께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ㆍ이재의(李在誼, 토마스) 등 네 사람을 신학생으로 뽑아 하루에 두 시간씩 라틴어를 가르쳤고, 얼마 뒤에는 그중 두 사람에게 신학을 가르침으로써 3년 안에 신품을 줄 계획도 갖고 있었다.
- 이외에 그는 일본의 류큐(琉球) 섬을 돌보기 위해 사천에서 데려온 회장을 보내려고 시도하였고, 박해의 조짐이 보이던 1838년 말부터는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 이야기>라는 박해 일기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일기는 앵베르 주교의 체포 뒤, 정하상ㆍ현경련(玄敬連, 베네딕다)ㆍ이문우(李文祐, 요한)를 거쳐, 최영수(崔榮受, 필립보)ㆍ현석문(玄錫文, 가롤로)ㆍ이재의 등에 의해 《기해일기》로 완성되었다.
[기해박해 순교와 그 이후]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다
- 박해는 1839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월 25일 동소문 밖 신자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1월 30일 상경(上京)하여 박해가 확대되기 전에 서둘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 조정에서는 4월 18일에 <사학 토치령>(邪學診治令)을 반포하였다.
- 5월 24일에는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과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등 9명이 공식 처형되었다.
- 앵베르 주교는 6월 3일 손경서(안드레아)ㆍ정화경(안드레아)이 마련한 수원 근처의 상귀(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송교리)로 피신하였다.
-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3명의 서양인 신부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무렵 배교자 김순성(金順性, 요한, 일명 여상)은 정화경을 유인해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아냈으며, 주교는 그의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8월 11일 자수 하였다.
- 다음 날(8월 12일) 서울로 압송된 앵베르 주교는 처음 좌포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았으며, 이어 의금부로 넘겨져 문초를 당하였다. 의금부에서 4차례의 심문을 받은 앵베르 주교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 그는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고 1839년 9월 21일 모방 신부ㆍ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 그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 일 후에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老姑山,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는 삼성산(三聖山,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57-1)으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가, 그 해 11월 2일 종현(현 명동)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1857년 9월 24일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고,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1858년】 그의 전기 《기해일기》가 파리에서 간행되다
- 그는 당시 순교자들의 전기 편찬을 계획하였는데, 그 전기인 《기해일기》가 1858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성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의 축일은 9월 20일(이전에는 6월 10일)이다.
【1925년】 79위 시복식으로 복자 품에 오르다
-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 베드로 신부 그리고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
【1984년】 103위 시성식으로 성인 품에 오르다
-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