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년 6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9세, 제238대 로마 교황 선출

【1667년 6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9세, 제238대 로마 교황 선출

1667년 6월 20일, 교황청은 전임자인 알렉산드로 7세(Alexander VII)의 서거 이후 치러진 교황 선거를 통해 줄리오 로스필리오시(Giulio Rospigliosi)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클레멘스 9세(Clement IX)라는 교황명을 택하고, 즉위 직후 전 유럽과 교회 내의 수많은 난제들을 다루며 재위 초기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본 글에서는 그가 즉위한 경위, 주요 정책과 외교 활동, 문화 후원, 도덕개혁, 그리고 짧지만 의미 있었던 재위 기간이 교황청 및 유럽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교황 선출 배경과 즉위】

– 알렉산드로 7세 사망과 콘클라베

1655년 즉위한 알렉산드로 7세가 1667년 사망한 뒤 로마 교황청에서는 새로운 콘클라베가 열렸다. 6월 2일부터 시작된 이 회기는 교황 선출 과정에서 프랑스ㆍ스페인 등의 세력과 ‘플라스드론네 볼란테(Squadrone Volante, 독립파)’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닌 인물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 로스필리오시의 선출

줄리오 로스필리오시는 당시 추밀실장(Secretary of State)으로서 스페인 외교에도 참여한 외교 전문 카드날이었다. 그의 균형 잡힌 인품과 포용력이 주요 세력의 화해인물로 부상하며, 6월 20일 첫 번째 당일 저녁 61표를 얻고 이를 최종 승인 받았다.

– 즉위와 교황 이름

로스필리오시는 즉석에서 클레멘스 9세라는 교황명을 받아 6월 26일 바티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으며, 7월 3일에는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공식 취임 의식을 가졌다.

【재위 초기 정책 방향】

– 정치ㆍ외교 : 평화 중재와 갈등 조정

클레멘스 9세는 즉위 후 신속하게 갈리칸주의(Gallicanism)와 얀센주의(Jansenism) 문제를 완화하고자 했다. 1668년 정식 명칭으로 클레멘티나 평화(Pax Clementina)를 성사시키며, 프랑스 가톨릭 내 분열을 일시적으로 봉합하였다. 또한 스페인ㆍ프랑스 사이 전쟁에도 중재 역할을 자처, 1668년 아헨(Aachen, 보통 타이프오프의 전후 조약) 회의에서 핵심적 중재자로 활동하며 유럽 내 평화 유지에 기여하였다.

–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전쟁

가장 큰 도전은 터키-베네치아 전쟁이었다. 그는 베네치아가 크레타 섬의 칸디아(Candia)를 수호하도록 적극 지원했지만, 프랑스 루이 14세의 협조는 제한적이었다. 결국 칸디아는 1669년 함락되며 교황에게 큰 타격이 되었고, 클레멘스 9세는 슬픔 속에 1669년 말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문화ㆍ사회적 개혁】

– 자선과 도덕성 강화

교황은 조세 인하를 단행하고, 곡물 독점을 해제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엘리트와 평민 모두에게 주기적으로 고백 성사를 받으며, 병원 방문과 빈민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 예술 후원 : 음악ㆍ건축ㆍ오페라

클레멘스 9세는 예술 후원가이자 작가로도 기록된다. 최초의 희극 오페라인 《Chi soffre, speri》의 원작 대본을 쓰고, 카를로 폰타나와 함께 로마에 최초의 공공 오페라 극장을 열었다.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와 협업해 성 베드로 광장 기도 열주와 성 천사의 다리(Ponte Sant’Angelo)에 조각상을 완성했다.

【교회 개혁과 인사 정책】

– 적정한 숙청과 인사

교황은 “nepotism(친족 등용)”을 최소화하며 가난하고 재능 있는 이를 우선했다. 자신의 사촌 및 조카 일부에게만 중책을 맡겼으며, 공공 건축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도록 하여 도덕적 리더십을 강화했다.

– 성인 시성 및 재정 정비

  • 1668년 산타 로사 데 리마(Rose of Lima, 1586~1617) 시복
  • 1669년 마리아 마글달레나 데 파치(Maria Magdalena de’ Pazzi, 1566~1607)ㆍ페드로 데 알칸타라(Peter of Alcantara, 1499~1562) 시성
  • 재정 개혁으로 건전한 교황청 재정 상태 유지

【역사적 의의】

  • 중재자 교황의 모범
    폐쇄적 권위를 넘어, 클레멘스 9세는 외교적 대화와 평화 조정 외교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 문화와 사람 중심의 리더십
    재위 기간이 짧았음에도 문화와 예술, 자선사업이 선명히 남았다.
  • 근대성의 교황정 구현
    교회 내부 위계와 외부 권위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며, 모던 교황제 모델을 제공했다.

【온화한 중재자, 문화의 교황】

1667년 6월 20일 즉위한 클레멘스 9세는 짧은 2년 반의 재위 동안 종교적 중재자, 자선가, 문화 후원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교황청의 역할을 내ㆍ외부 모두에서 조화롭게 재정의한 그는, 유럽ㆍ교회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되며, “온화한 중재자이자 문화의 교황”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