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0년 6월 20일】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다 – 제1차 우지 전투 해설

【1180년 6월 20일】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다 – 제1차 우지 전투 해설

 

1180년 6월 20일, 일본 교토 외곽 우지 강가에서 제1차 우지 전투가 발생했다. 이 전투는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의 실질적 개시를 알린 사건이다. 단순한 반란 진압을 넘어, 중세 일본의 권력 구조와 무사 정치의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본 글에서는 전투의 배경, 전개, 결과 및 의의를 서술 형식으로 정리한다.


헤이안 말기의 권력 구조

 

헤이안 시대 말기에 황실의 정치적 권력은 귀족 가문, 특히 평가(平家)로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도 평청승(平清盛)이 권력을 장악하며 중앙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은 황족과 무사 계층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과거에 세력을 상실했던 겐지(源氏) 가문은 재기의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모치히토 친왕의 격문과 도주

 

1180년 5월, 황족 모치히토 친왕(以仁王)은 평가의 전횡에 반발하며, 전국의 겐지 및 사찰 세력에게 격문(檄文)을 발송했다. 미이데라 등지의 승병들이 이를 수용했으나, 평가군의 신속한 진압으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친왕과 겐지노 요리마사(源頼政)는 교토를 빠져나가 우지 강가로 도주하게 되었다.

 

우지 강에서의 최후 방어

 

도주 일행은 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뵤도인 근처 우지 강 다리에 도달했다. 그들은 다리의 판자를 제거하여 적의 진입을 방해하고, 활ㆍ창ㆍ낭기나타 등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맞서는 평가군은 평토모모리(平知盛)와 평시게히라(平重衡)가 지휘하는 약 2만 8천 명의 대군이었다.

 

새벽의 격전

 

전투는 안개 낀 새벽에 시작되었으며, 평가군은 강제 돌파 작전을 감행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반군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밀려났다. 이 전투는 일본 무사 문화 측면에서 중요한 첫 무장 충돌로 기록된다.

 

지도자들의 운명

 

전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요리마사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자결(切腹)을 결행했다. 이는 일본 무사도에서 상징적 역사로 기록되었다. 모치히토 친왕은 도주하다 붙잡혀 처형되며, 반란 세력의 지도부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단기적 성과와 장기적 파장

 

이 전투는 전략적으로 평가군의 전술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반란의 궤멸에도 불구하고, 이는 곧 겐페이 전쟁의 발화점이 되었다. 이후 무사 집단과 지역 세력은 겐페이 전쟁을 계기로 결집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정치 질서의 재편이라는 긴 흐름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중세 일본사의 전환점

 

제1차 우지 전투는 헤이안 체제의 붕괴를 예고하면서 무사 중심의 가마쿠라 막부 체제 수립의 전초가 되었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동국을 중심으로 병력을 재조직했고, 1192년에 막부를 성립하면서 일본 정치권력의 중심 축이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요리마사의 자결은 충의와 무사 정신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 전투는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등 문학적 전승을 통해 후대에도 꾸준히 회자되었다.

 

제1차 우지 전투의 의의

 

1180년 6월 20일의 제1차 우지 전투는 단기적으로는 겐지 세력의 패배로 끝났지만, 장기적으로는 중세 일본 정치 구조의 근본적 전환을 촉발한 역사적 기폭제였다. 겐페이 전쟁의 서막이자 무가 정치 체제의 서막으로, 해당 사건은 일본 중세사의 중요한 기점이자 중심축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