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드 클레어 [Richard de Clare, c.1130~1176] 제2대 펨브룩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 [Richard de Clare, c.1130~1176] 제2대 펨브룩 백작

  • 이름 : 리처드 드 클레어(Richard de Clare), 때때로 리처드 피츠길버트(Richard FitzGilbert)로도 불린다
  • 별명 : 스트롱 보우(Strongbow) / 앵글로-노르만어(Arc-Fort, 강한 활)
  • 출생 : 1130년경, 영국 켄트 주 턴브리지
  • 사망 : 1176년 4월 20일, 아일랜드 더블린
  • 직위 : 제2대 펨브룩 백작(2nd Earl of Pembroke), 렌스터 영주, 아일랜드 총독(Justiciar of Ireland)

리처드 드 클레어는 12세기 잉글랜드 귀족이자 아일랜드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스트롱보우(Strongbow)”라는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앵글로-노르만 아일랜드 침공의 중심 인물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개입과 통치의 서막을 연 장본인이다.

【출신과 가계】

리처드는 영국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대 펨브룩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와 이사벨 드 보몽(Isabel de Beaumont)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이사벨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몽의 딸이자,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정부(情婦)로도 알려져 있다. 따라서 리처드는 잉글랜드 왕가와 간접적인 혈연 관계가 있는 셈이다. 리처드는 또한 바실레아 드 클레어(Basilea de Clare)라는 이름의 여동생도 있었다.

그는 켄트주의 톤브리지(Tonbridge)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어린 시절부터 귀족의 아들로 자라나 군사적, 정치적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1148년경 사망하자, 리처드는 18세도 안 된 나이에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펨브룩 백작(Earl of Pembroke)’이라는 작위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1154년에는 헨리 2세가 리처드가 ‘무질서 시대(The Anarchy, 1138~1154)’ 동안 헨리 2세(Henry II)의 어머니인 마틸다 여제(Empress Matilda)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그 작위를 박탈하였다.

【렌스터 원정과 아일랜드 침공의 서막】

당시 아일랜드는 여러 토착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에 왕권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160년대 중반, 렌스터 왕 더머릿 맥머로(Diarmait Mac Murchada, 1126~1171)는 자신이 쫓겨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외부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는 리처드 드 클레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기회로 삼은 리처드는 렌스터 왕국을 점령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따라, 1169년부터 리처드는 병력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했으며, 1170년에는 더머릿의 딸 아이페(Aoife MacMurrough, c.1153~c.1188)와 결혼해 정식으로 렌스터의 후계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써 리처드는 단순한 군사지원자가 아닌 왕가의 사위이자 지배권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더블린 등 주요 지역을 장악했고, 잉글랜드-노르만 세력이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본격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과정은 후일 수백 년에 걸친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로 이어졌다.

【헨리 2세와의 관계, 그리고 정당성 확보】

아일랜드에서 리처드의 급부상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에 헨리는 리처드에게 무단 점령과 결혼에 대한 정당성 설명을 요구했고, 리처드는 왕의 승인을 받기 위해 렌스터의 많은 땅을 왕에게 봉신 관계로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헨리 2세는 1171년 아일랜드 원정을 단행, 리처드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는 방식으로 아일랜드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리처드는 단순한 용병 지도자가 아닌, 왕권하의 공식 봉신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아일랜드 총독(Justiciar)으로 임명된다.

【사망과 상속】

사망

리처드 드 클레어는 1176년 6월, 다리 또는 발에 생긴 감염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더블린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매장되었는데, 그의 아내의 삼촌인 더블린 대주교 로렌스 오툴(Laurence O’Toole)도 그곳에 함께 묻혔다. 리처드가 죽자 헨리 2세는 그의 영지를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왕실관리관을 배치해 리처드의 자녀들이 받을 상속권을 보호하였다.

리처드의 아내 아이페는 과부 재산권을 보장받았고, 1184/1185년 웨일스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스트리길(Striguil)을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관계

리처드 드 클레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성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다.

  • 앨라인 드 클레어(Aline de Clare) : 네이스(Naas)의 남작 윌리엄 피츠모리스 피츠제럴드(William FitzMaurice FitzGerald)와 결혼
  • 바실리아 드 클레어(Basilia de Clare) : 렌스터(Leinster)의 총사령관(콘스터블) 로버트 드 퀸시(Robert de Quincy)와 결혼

그는 1171년 8월 26일경, 워터퍼드(Waterford)의 레지널드 타워(Reginald’s Tower)에서, 리처드 드 클레어는 아이페 막머로우(Aoife MacMurrough)와 공식적으로 결혼하였고, 그들 사이에서 두 자녀가 태어났다.

  •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 : 제3대 펨브룩 백작, 1185년에 미성년으로 사망하였다.
  • 이사벨 드 클레어(Isabel de Clare) : 제4대 펨브룩 여백작(Countess of Pembroke)으로, 오빠의 사망(1185년) 이후 백작 작위를 계승하여, 1220년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였다. 그녀는 전설적인 기사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과 결혼하였고, 마셜 가문이 펨브룩 백작위를 이어받아 13세기 잉글랜드 귀족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별명 ‘스트롱보우(Strongbow)’】

흥미롭게도, 리처드 본인은 생전에 ‘스트롱보우’라는 별명을 사용한 기록이 없었다. 이 별명은 중세 문서에서 ‘Stranghose’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으며, 후에 ‘Strongbow’로 오해되거나 의역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스트롱보우’가 그의 상징적 별명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역사적 의의】

리처드 드 클레어는 단순한 전투 지휘관이 아니라, 군사적 정복과 결혼을 통한 정치적 합법성 확보, 그리고 왕권과의 협상까지 수행한 전략가이자 행정가였다.

그의 아일랜드 원정은 영국-아일랜드 관계사의 전환점으로, 오늘날까지도 논쟁적이고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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