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D. 121~180]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AD. 161~180)
【개인 정보】
- [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
- [출생] 기원후 121년 4월 26일, 이탈리아 로마
- [사망] 기원후 180년 3월 17일, 빈도보나(Vindobona) 또는 시르미움(Sirmium)
- [재위] 기원후 161년 3월 7일 ~ 181년 3월 17일
- [전임]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86~161) :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AD. 161~180)
- [후임] 콤모두스(Commodus, AD. 161~192) : 로마 제국 제17대 황제(AD. 177~192)
【가족 관계】
- [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
[양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Domitia Lucilla) : 기원후 155년에서 161년 사이에 사망
- [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D. 121~180) :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AD. 161~180)
- [배우자] 파우스티나(Faustina the Younger, ?~175) : 기원후 145년 결혼
- 도미티아 파우스티나(Domitia Faustina, 147~151)
- 티투스 아일리우스 안토니누스(Titus Aelius Antoninus, 149)
- 티투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Titus Aelius Aurelius, 149)
- 안니아 아우렐리아 갈레리아 루킬라(Annia Aurelia Galeria Lucilla, 150~182) : 아버지의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와 결혼한 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Tiberius Claudius Pompeianus)와 재혼하였다.
-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Annia Galeria Aurelia Faustina, 151~?) :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Gnaeus Claudius Severus)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 티베리우스 아엘리우스 안토니누스(Tiberius Aelius Antoninus, 152~?) : 156년 이전 사망
- 무명(Unknown child) : 158년 이전 사망
-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Annia Aurelia Fadilla, 159~?) : 마르쿠스 페두카에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Marcus Peducaeus Plautius Quintillus)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 미노르(Annia Cornificia Faustina Minor, 160~?) :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Marcus Petronius Sura Mamertinus)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Titus Aurelius Fulvus Antoninus, 161–165) : 콤모두스(Commodus)의 쌍둥이 형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Commodus, 161~192) :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Titus Aurelius Fulvus Antoninus)의 쌍둥이 형제로, 후에 황제가 되었으며, 브루티아 크리스피나(Bruttia Crispina)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Marcus Annius Verus Caesar, 162~169)
- 하드리아누스(Hadrianus)
-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Vibia Aurelia Sabina, 170~?) : 217년 이전 사망.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Lucius Antistius Burrus)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애】
【출생과 가문, 어린 시절】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4월 26일,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에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 출생 이름 : 마르쿠스 안니우스 카틸리우스 세베루스(Marcus Annius Catilius Severus) 또는 마르쿠스 카틸리우스 세베루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Catilius Severus Annius Verus)
- 할아버지에게 입양되었을 때 이름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
-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입양되었을 때 이름 :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카에사르(Marcus Aelius Aurelius Verus Caesar)
- 황제 즉위 후의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 아버지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로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후에 이베리아로 이주하였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는 원로원이자 전직 법무관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는 73~74년에 패트리키우스(고귀한 혈통)으로 임명되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난 해 집정관을 지냈으며 총 집정관을 세 번 맡았다.
- 어머니는 도미티아 루킬라(Domitia Lucilla)는 칼비시우스 툴루스(P. Calvisius Tullus)의 딸로 그 많은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외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Rupilia Faustina)는 황제 트라야누스의 조카인 살로니아 마티디아(Salonia Matidia)의 의붓 딸이었다.
- 136년 마르쿠스보다 두 살 아래인 누이동생 코르니피키아가 사촌인 우미디우스 콰드라투스와 결혼하였다. 신부의 아버지와 신랑의 어머니는 친남매 사이였다.
-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7살의 마르쿠스는 ‘살리우스 팔라티누스’(Salius Palatinus), ‘군신 마르스 사제회’의 일원이 되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양자가 되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과 약혼하다]
- 136년, 하드리아누스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그는 20년 전에 하드리아누스의 치세 초기에 트라야누스의 중신 네 명을 재판 없이 숙청한 적이 있다. 제국의 방침을 트라야누스의 확장 노선에서 방어 위주의 노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그 네 명 가운데 하나인 하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에게는 6세의 아들과 11세 된 딸이 있었다.
- 그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5살이었는데,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의 딸인 케이오니나와 약혼하였다. 그 직후에 하드리아누스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공표했다(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이름을 바꿨다). 마르쿠스는 차기 황제의 딸과 약혼한 셈이다. 순리대로 하면 당시 6살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차기 황제가 될 터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처음에는 마르쿠스를 황제 후보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를 옆에서 도와주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으면 매형으로서 성의껏 협력하기에 적당한 인재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마르쿠스와 케이오니나를 약혼시킨 것 같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계자가 되다]
- 138년 1월 1일, 차기 황제로 결정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려고 의관을 갖추다가 엄청난 피를 토하고 (아마도 결핵으로) 죽었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후계자 결정이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인데, 족보를 더듬어 가면 남프랑스 속주 출신이다. 나이는 52세. 성숙도를 중시하는 로마 사회에서는 이 나이도 좋은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 안토니누스에게 딸은 있지만 아들은 없었다. 이 점이 하드리아누스에게는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62세, 안토니누스는 52세이니 앞으로 13년 정도는 더 살 수 있고, 그 기간만 버텨주면 지금은 열일곱 살 밖에 안된 마르쿠스도 국가 요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 연령인 30세가 된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 하드리아누스의 머릿속에는 마르쿠스의 존재가 점점 커지고 뚜렷해졌다.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에게 제시한 조건]
- 138년 2월 25일,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후계자 지명을 공표했다. 안토니누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조건을 모두 수락했기 때문이다. 첫째, 곧 17세가 되는 마르쿠스와 죽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은 여덟 살의 루키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일 것, 둘째, 이미 약혼한 사이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과 마르쿠스가 적령기에 이르면 곧바로 결혼시킬 것, 셋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가 적령기에 이르면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킬 것이다.
- 아마도 하드리아누스가 정말로 제위를 물려주고 싶은 상대는 마르쿠스였고, 안토니누스는 단지 중계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자비로운 안토니누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를 역사가들은 로마인이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평가한다.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약혼하다]
- 서기 138년 7월 10일, 하드리아누스의 사망과 동시에 안토니누스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안토니누스는 양자로 삼은 마르쿠스를 불러 죽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과 파혼하고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약혼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으며, 17세였던 마르쿠스는 잠시 생각한 뒤에 승낙하였다.
- 파우스티나는 당시 8살이었으니까, 약혼했다고 곧바로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약혼을 승낙함으로서 나중에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근친 결혼을 하게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내와 마르쿠스의 아버지는 친남매 사이였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이고, 그의 딸 파우스티나와 마르쿠스는 사촌 남매 사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공직 생활]
- 139년, 18세가 된 마르쿠스는 회계감사관에 선출되면서 처음으로 공직을 경험하였다. 25세 무렵에 회계감사관을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던 시대에 18세의 회계감사관은 이례적이었다. (참고로 트라야누스는 28세, 하드리아누스는 25세에 시작했다) 그해 안토니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주었다. 마르쿠스는 18살에 벌써 황제 자리를 약속받은 몸이 되었다. 마르쿠스는 황궁에 함께 살기를 원하는 황제 안토니누스의 뜻을 받아들여 첼리오 언덕에서 팔라티노 언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안토니누스 황제의 치세 내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와 함께 행동하면서 후계자 수업을 하였다.
- 마르쿠스는 140년 집정관 선거에 황제 추천으로 입후보하였다. 마르쿠스는 원로원 의원도 아니고 법무관을 지낸 경험도 없이 19세에 집정관이 되었고, ‘내각’의 상임위원이 되었다.
- 145년, 24세가 된 마르쿠스는 황제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47년 11월 30일, 파우스티나가 첫 아이를 낳았다. 딸에게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도미티아 파우스티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튿날 12월 1일, 첫 손주의 탄생을 기뻐한 황제는 마르쿠스에게 황제의 특권 가운데 하나인 ‘호민관 특권’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딸에게는 ‘아우구스타’(황후)라는 칭호를 주었다. 트라야누스가 44세에 호민관이 되었지만, 마르쿠스는 26세에 호민관이 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죽음]
-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 별장에 머물고 있던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갑자기 몸져누운 지 이틀 만에 잠자듯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질서있는 평온’이라고 평가받은 치세의 종막에 어울리는 평온한 죽음이었다.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달은 황제는 한 가지 유언을 남기고, 한 가지 일을 시킨 뒤에 숨을 거두었다. 유언은 장례를 너무 화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것이었고, 측근 신하들에게 명령한 일은 황제의 침실에 놓아두도록 되어 있는 ‘행운의 여신’ 황금상을 마르쿠스의 침실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마르쿠스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는 확실한 의사 표명이었다.
- 마르쿠스는 아홉 살 아래인 루키우스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신격화는 간단히 실현되었다. 마르쿠스가 요청하기도 전에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신격화를 결의하였기 때문이다. 치세 동안 줄곧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정책을 결정할 때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호평을 받은 것도 당연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선언하다]
- 마르쿠스가 황제 취임을 요청받은 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루키우스와 둘이라고 언명했다. 이것은 원로원이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고, 두 황제가 공존하는 것은 로마 역사상 전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원로원 대표는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에게 황제 취임을 요청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루스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 두 사람은 황제와 부황제가 아니라 권위와 권력을 동등하게 나누어 갖는 완전한 동격이었다. 유일하게 공유하지 못한 것은 한 사람만 맡아야 하는 전통의 ‘최고제사장’의 지위였으며, 이것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혼자 취임하게 되었다. 공동 황제를 제안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인 황제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공화정의 공직은 복수제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제왕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양아버지’ 안토니누스는 이 ‘아들’도 명예로운 경력을 거치게 했다. 23세에 회계감사관, 24세에 첫 번째 집정관, 161년에는 마르쿠스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다. 하지만 루키우스 베루스는 31세가 될 때까지 군단 생활을 경험한 적도 없고, 이탈리아 본국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다(그 점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였다).
- 루키우스는 장남 타입인 마르쿠스처럼 강한 책임감은 갖고 있지 않은 대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마르쿠스의 솔직함은 통제된 솔직함인 반면, 루키우스의 솔직함은 통제되지 않은 솔직함이었다. ‘명예로운 경력’을 거치게 하긴 했지만, 안토니누스 황제에게 루키우스는 마르쿠스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아니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벤치에 앉혀놓은 후보선수일 뿐이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루키우스의 약혼녀로 결정해둔 자기 딸 파우스티나를 마르쿠스와 약혼시킨 뒤에도 루키우스에게 다른 신부감을 정해줄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새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는 31세가 되도록 약혼녀도 없는 독신이었다. 로마 여인들은 젊은 총각 황제에게 열광했다.
-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일은 마르쿠스에 대한 루키우스의 감정이었다. 루키우스는 차별 대우를 받는 사람이 품기 쉬운 원망이나 부러움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랐다. 자기보다 항상 앞서가는 마르쿠스를 시샘하기는커녕, 형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정말로 좋은 ‘형’과 ‘아우’였다.
- 161년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바쁜 해였다. 8월 31일에 아내 파우스티나가 쌍둥이를 낳았다. 마르쿠스는 40세의 나이에 벌써 11명의 자녀를 낳은 셈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넷은 첫돌도 맞기 전에 죽었고, 쌍둥이 가운데 하나도 다섯 살 때 죽었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딸 다섯과 쌍둥이 가운데 살아남은 아들 하나뿐이다. 이 사내아이가 마르쿠스의 후임 황제가 되는 콤모두스였다. 이듬해인 162년에 딸이 태어났고,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는 곧 죽었고, 마지막으로 170년에 태어난 딸을 합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녀는 모두 14명이나 되었다.
【파르티아 전쟁】
[파르티아의 아르메니아 침공]
- 161년, 로마에 보기드문 흉작이 닥쳐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르티아 왕은 로마 황제 교체기를 로마로 쳐들어갈 좋은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해 파르티아 군대는 시리아 속주가 아니라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것은 제국의 동방을 지키는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 3세는 아르메니아의 수도를 공격하고, 불안해진 주민의 봉기를 이용하여 친로마파 왕을 쫓아내고, 대신 반로마파인 파코루스를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 당시 시리아 속주 총독은 아티디우스 코르넬리아누스였다. 그는 이미 노령으로 은퇴를 결정하고, 새 황제가 임명해줄 후임 총독이 도착하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시리아 총독은 동방 방위선의 최고 책임자로서 부하인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에게 파르티아군을 맞아 싸우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가 데리고 간 병력의 주전력은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그의 로마 군단은 궤멸되었고, 지휘를 맡았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파르티아가 시리아 속주를 공격하다]
- 마르쿠스와 루키우스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의 후임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를 임명했다. 이 장군이 2년 전인 159년에 집정관을 지냈을 때 아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에 거리가 너무 먼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었다.
-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킨 파르티아는 이어서 목표를 시리아 속주로 바꿨다. 시리아 속주 총독은 반격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궤멸을 면치 못했고 로마군은 퇴각했다. 오리엔트 사람들은 항상 강한 쪽에 붙는 습성이 있었다. 로마의 패배에 동요한 오리엔트의 작은 군주들 사이에 로마와의 동맹관계를 파기하고 파르티아 쪽에 붙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로마는 다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로마의 대응,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가 전선으로 향하다]
- 본격적으로 황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야하는 사태가 되었다. 동방에는 31세의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가기로 결정했다. 마르쿠스는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을 루키우스의 수행원으로 딸려 보냈다. 그들 가운데 군사경험이 풍부한 푸리우스 빅토리누스, 폰티우스 라일리아누스 등이 있었다. 그리고 시리아 속주 총독 후임에는 사촌인 안니우스 리보를 임명했다.
- 마르쿠스는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맡고 있는 8개 군단에다가 서방에서 3개의 군단 이상의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로써 163년에 반격을 개시할 예정인 로마군의 주전력은 4만 7천명 정도였다.
- 162년 초여름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를 떠나 오리엔트로 출발하였다. 루키우스는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의 코린트에 상륙하여 아테네로 갔다. 루키우스는 아테네에 눌러앉아 32세의 생일도 그곳에서 맞았고 느긋하게 여행하여 그해 겨울에서야 목적지인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반면 브리타니아에서 카파도키아로 임지가 바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가 서둘러 달려왔다. 한편 로마에서 마르쿠스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로마군의 본격적인 반격]
-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루키우스가 주재한 작전회의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격렬한 논쟁은 황제 루키우스와 시리아 신임 속주 리보 사이에 벌어졌다. 이 사태를 수습한 것은 황제의 수행원들이었다. 그들이 두 사람을 제쳐놓고 작전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총독 리보는 안티오키아에서 병사했는데, 루키우스도 충격을 받아 리보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책임감은 부족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 마르쿠스가 후임 총독으로 임명한 것은 경험이 풍부한 율리우스 베루스였다. 황제 루키우스는 몸소 군대를 지휘하기도 싫어했고 군대를 이끌고 전선에서 싸우는 장군들의 전략과 전술에 참견하지도 않았다. 그 점은 칭찬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자 역시 그 전력은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했다.
[로마, 아르메니아를 탈환하다]
- 163년 봄에 아르메니아 전선에서 시작된 반격의 주역은 카파도키아 군단을 재건하기 위해 브리타니아에서 불려온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였다. 본에 기지를 둔 제1 미네르바 군단도 군단장인 클라우디우스 프론토의 지휘로 참전했으며, 빈에 주둔하는 제10 게미나 군단의 일부도 군단장 게미니우스 마르키아누스의 지휘로 참전하였다. 시리아 속주에 주둔하는 2개 군단은 시리아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 군단의 지휘자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다. 기라성 같은 당대의 맹장들이다.
- 파르티아군이 지키고 있던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는 로마군의 맹공에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파코루스 왕자는 쫓겨나고 대신 친로마파인 소파에무스가 왕위에 올랐다. 163년 말까지 아르메니나 전역에서 파르티아 군대를 몰아냈다.
[루키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루킬라와 결혼하다]
- 루키우스는 당시에 소아시아 태생의 그리스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마르쿠스는 자기 딸 루킬라를 루키우스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법적으로는 숙부와 조카딸이지만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였다. 루키우스는 33살, 루킬라는 13살이었다.
- 이후 시리아에서 대기했던 시리아 군단도 합류하여 파르티아 왕국의 심장부로 전진했다. 164년 루키우스는 루킬라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 에페소스로 향하였다. 마르쿠스는 딸에게 ‘아우구스타’(황후)라는 존칭을 주었다. 에페소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루키우스는 루킬라를 데리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애인인 그리스 미녀는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파르티아 왕국을 철저하게 약화시키다]
-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을 맞아 후퇴를 거듭하면서 붕괴 직전에 몰려 있었다. 이 무렵부터 황제 루키우스가 전략에 참견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전쟁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니까 지금이 강화를 맺기에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결국 자신의 제안을 철회하고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 제3기의 전쟁 목적은 파르티아 영토의 중심부까지 깊이 쳐들어가 철저히 부순 뒤에 철수하는 것이었다. 시리아 출신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독무대였다.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 기병대의 행동은 신출귀몰했다. 파르티아 전쟁은 로마에 손을 대면 어떤 꼴이 되는가를 오리엔트 사람들에게 재인식시킨 전쟁이었다. 이것이 파르티아 왕국을 약화시켜 결국 60년 뒤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대두되는 원인이 되었다.
- 전쟁이 끝난 166년 10월, 로마에서는 귀국한 루키우스를 맞아 파르티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파르티아 전쟁 기간에 로마에 남아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자녀를 낳으면 30일 이내에 신고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예비 군단병의 수를 대충이라도 예측하는 것이 이 법률의 목적이었던 것 같다.
[동방에서 전해진 역병(페스트), 그리고 기독교]
-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식에 참가한 병사들 사이에 역병이 발생하였다. 역병과 그에 따른 사회 생활의 침체, 그리고 북방에서 다가오는 야만족의 위협은 로마인의 마음을 어둡고 무겁게 바꾸어 놓고 있었다. 황제 마르쿠스는 이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신들에게 기원을 드리는 대규모 제의를 올렸다. 그런데 이 제의에 참가하지 않는 존재가 눈에 뜨였다. 황제가 앞장선 제의에 기독교도들이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로마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무신앙자, 공공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고 비난하였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야 할 때 그 상황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마음의 준비는 기독교도처럼 고집스러울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도달한 결과여야 한다.”
【북쪽 게르만족과 대결하다】
[황제, 도나우 강으로 향하다]
- 마르쿠스는 북방 방위선을 침범하는 야만족의 위협을 신앙으로만 해소할 수는 없었다. 168년 봄,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황제는 도나우 강으로 떠나기로 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경험부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황제를 수행하는 ‘브레인’은 파르티아 전쟁 때 루키우스의 수행원으로 딸려 보낸 폰티우스 라일리아누스를 비롯하여, 전쟁터가 될 도나우 강 주변을 잘 알고 있는 판노니아와 모이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 게르마니아 전쟁에서는 황제 마르쿠스의 경험 부족을 보완하는 것이 ‘수행원’들의 역할이었다.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면 그것을 당장 보완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가 현제로 평가받는 이유다.
- 황제가 몸소 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야만족들은 두려움으로 후퇴했다. 전투에 적합한 봄부터 가을까지의 기간을 마르쿠스는 전선을 시찰하였다.
[루키우스 베루스의 사망과 루킬라의 재혼]
- 168년에서 169년에 걸친 겨울을 두 황제는 아퀼레이아에서 나기로 했다. 이것은 도나우 강 전선기지에 만연했던 역병을 걱정한 시의(侍醫) 갈레누스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 같다. 또는 루키우스가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를 붙잡으려고 애쓰던 황제가 타협안으로 제시했다는 설도 있다.
- 169년에 갑작스럽게 루키우스가 뇌졸중으로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루키우스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딸 루킬라의 재혼을 서둘렀다. 마르쿠스는 만약의 경우에 어린 콤모두스를 도와 제국이 내란에 빠져들지 않도록 존속하게 해줄 사람을 찾았다. 루킬라의 재혼상대로 선택된 사람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였다. 그는 황제와 비슷한 또래였고, 루킬라는 루킬라는 19세였다.
- 그 후 10년이나 계속된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마르쿠스는 실제 지휘를 폼페이아누스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었고, 그 후 20년 동안 로마 제국의 방위를 담당하게 될 무장들은 대부분 폼페이아누스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콤모두스가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신뢰한 사람이 매형인 폼페이아누스였다고 한다.
-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남편의 낮은 출신 성분이 황제의 딸이자 황후였던 루킬라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170년, 다키아 북부를 향한 대규모 공세]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키아 속주의 북부가 170년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다키아 북부에서 야만족을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170년 봄에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를 북상하면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공격의 지휘는 파르티아 전쟁 때도 활약한 클라우디우스 프론토이다.
- 그는 오리엔트에서 돌아온 뒤 ‘가까운 모이시아’ 속주와 ‘다키아’ 속주의 총독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산악지대로 들어간 것 같다. 로마군은 평원에서는 무적이지만 좁은 전쟁터에서는 무기력했다. 격전 끝에 적은 패주했지만 사령관 프론토는 전사했고 포로가 2만명이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포로는 대부분 병사가 아니라 다키아 속주민이었다.
[마르코마니족이 아퀼레이아를 습격하다]
- 로마군의 공세가 다키아 북부에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서 양쪽으로 도나우 강을 건넌 게르만의 2개 부족이 행동을 취했다. 마르코마니족은 로마의 영토로 들어온 뒤 계속 남하하여 아퀼레이아를 습격했다. 그들은 전투원인 남자들만 쳐들어왔고 로마 가도가 아닌 산야를 질주하여 허를 찔렀다. 그러나 바람처럼 남하했던 그들은 약탈에 욕심을 부려 북상하는 속도가 떨어졌으며, 그것을 폼페이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기다렸다가 그들을 학살하였다.
- 그러나 일시적으로 방어선이 뚫린 것은 로마인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마르쿠스는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으나, 1) ‘이탈리아와 알프스의 방위부대’를 신설하였고, 2)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으며, 3) 도나우 강 중류에서 흑해로 흘러드는 하류의 방위력을 재검토했다.
[남쪽과 동쪽에서의 위협]
- 북아프리카에 사는 마우리타니아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약탈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마르쿠스는 급히 파르티아 전쟁 때 활약한 베테랑 장군인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를 이베리아로 파견했다.
- 제국의 북방에서는 야만족이 침입하지만, 동방에서는 의외로 파르티아 왕국의 야만족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의 군사력을 견제하면서도 파르티아 왕가를 붕괴시키지는 않았다. 제국 남부의 북아프리카는 사막을 건너 쳐들어오는 원주민은 대군을 조직할 능력이 없어서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결국 로마 제국의 야만족 대책은 유럽 북부에서 쳐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이 일을 실제로 맡고 있는 것이 라인강과 도나우 강과 브리타니아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었다.
[171년, 야만족들과 협상]
- 171년 마르쿠스는 도나우 강 전선에서 50세 생일을 맞았다. 마르쿠스는 야만족의 대표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마르쿠스는 로마군의 전력 보강을 위해 보조전력인 보조병 가운데 우수한 사람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군단병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검투사에게도 군대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노예 검투사도 받아들였다. 나아가 산적으로 편성된 부대까지 신설하였다. 그러나 미래 세대인 17세 미만의 지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대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르쿠스는 황궁 안의 물건을 경매로 내놓아 자금을 충당했다. 금화와 은화의 양을 줄이는 방책도 썼다.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 : 172~174년】
[172년, 도나우 강 전선]
- 172년 도나우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한 로마군은 패배했다. 근위대장 빈덱스까지 전사해 버렸다. 지난해에 강화를 맺은 콰디족이 마르코마니족의 승리를 보고는 로마와 맺은 강화를 파기하고 게르만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 같은 해 말에 로마군은 마르코마니족한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를 의미하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전선에 있는 마르쿠스에게 바쳤다. 그해 11살이던 마르쿠스의 외아들 콤모두스도 그 존칭을 받았다. 자신의 현지 경험 부족으로 말미암은 폐해를 자각했는지, 마르쿠스가 하나뿐인 아들 콤모두스를 도나우 강 전선으로 불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원의 결의는 너무 성급했다. 172년에 로마군은 고전을 거듭했고, 그래도 게르만인 중에서 유력한 부족으로 꼽히는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을 이긴 덕분에 겨우 체면을 유지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해에는 제국 동방도 평온 무사한 상태가 아니었다.
[동방 지역 :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다]
- 이집트 원주민들이 이집트의 전통 종교 의례를 담당하는 신관들의 부추김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 도나우 강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마르쿠스는 파르티아 전쟁 때 크게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뒤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승진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휘하의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집트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이집트는 황제 개인의 영지였고, 원로원 의원은 황제의 허가 없이는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황제는 카시우스를 시리아 속주 총독에서 동방 전역의 총사령관으로 승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파르티아 전쟁 때 루키우스 황제가 차지한 지위와 동격이다. 동방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에 오른 셈이다.
- 동방 전역의 총사령관에 임명된 카시우스는 멋지게 그 임무를 수행했다. 이집트 폭동은 조기에 진압되었고, 게다가 이집트 원주민의 원한을 사지 않는 형태로 진압되었다. 이집트에서 카시우스의 평판이 좋았다. 마르쿠스 황제는 카시우스가 폭동을 진압하고 시리아 속주로 돌아간 뒤에도 그를 동방 총사령관 자리에 그대로 앉혀두었다. 그리고 이것이 3년 뒤에 일어난 재난의 원인이 되었다.
[동방 지역 : 아르메니아 사태]
- 172년 당시 오리엔트에서 일어난 또 다른 변고는 아르메니아 사태였다. 로마가 도나우 강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킨 틈을 타서 친파르티아파가 쿠데타를 기도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쿠데타 세력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해결되었다. 아르메니아 왕국과 맞닿아 있는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인 마르티우스 베루스의 외교 수완 덕분이었다.
[173년, 각개 격파 작전으로 변경하다]
- 173년 서방에서는 게르마니아 전쟁이 재개되었다. 172년에는 전면전이었지만 173년에는 각개 격파 작전으로 바뀌었다.
- 야만족의 특징은 통일이나 단결에 서투르다는 것이다. 172년 당시에도 게르만 부족들은 공동투쟁 전선을 결성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의 총사령관 밑에서 단결하여 로마와 맞서고 있지는 않았다.
- 야만족은 원래 일관된 전략이 없기 때문에 로마군도 상대의 전략을 읽을 수 없다. 로마군은 일관된 전략이 없는 적을 상대하는 전투에 서툴렀다. 이런 경우에 효과적인 방법은 카이사르가 구사한 전략이다. 적을 한 곳에 몰아놓고, 집결한 적을 상대로 멋지게 전과를 올린다. 그러면 적은 경탄하고,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승자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 173년에는 우선 전쟁터를 레겐스부르크에서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도나우 강 북안 일대로 한정했다. 주적은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이었지만, 로마군은 그들의 산하에 있는 중소 부족을 주요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이 전략은 멋지게 성공하여 게르만 부족들은 마르쿠스 마르쿠스에게 강화를 요청해 왔다. 마르쿠스는 야만족을 믿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를 맺었다.
[174년, 사르마티아 전쟁]
- 174년 로마군은 야지게스족과 싸우게 되었다. 그들도 북쪽에서 내려온 사르마티아족에게 밀려나 로마군과 부딪치게 된 것이다. 로마인은 174년의 전쟁을 ‘사르마티아 전쟁’이라고 불렀지만 실제 적은 야지게스족이었다.
- 황제는 신체적으로 건강과 거리가 멀었다. 황제는 위장과 심장의 통증을 지병으로 갖고 있었다. 173년에서 174년에 걸친 겨울, 남편의 건강이 염려되었는지 황후 파우스티나가 도나우 강변의 진영을 찾아왔다. 딸 루킬라도 동행했다. 5년 만에 다시 황후와 일상생활을 시작한 곳은 도나우 강을 따라 한참 내려간 곳에 있는 시르미눔이었다. 174년에 일어날 ‘사르마티아 전쟁’ 때는 이곳이 참모본부가 되었다. 174년의 ‘사르마티아 전쟁’에서 주도권은 로마가 쥐고 있었고 결국 야지게스족도 강화를 요청했고 마르쿠스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북쪽으로 눈길을 돌려 야지게스족 거주지를 절반 침범한 사르마티아족과 대결해야 했다.
[마르쿠스의 구상 : 야만족의 속주화]
- 마르쿠스는 야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트라야누스 황제가 썼던 방법인 격퇴한 뒤에 끌어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이 요청한 것은 속주화가 아니라 강화였다. 말로 설득이 되지 않으면 힘으로 압도해야 한다. 로마로서는 군사력으로 압도한 후에 속주화를 하는 방법이 유일했다.
- 마르쿠스는 보헤미아 전역의 속주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불행한 사태 때문에 이 구상을 뒤로 미뤘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잘못된 정보, 잘못된 판단]
- 시리아 속주 총독인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이 사태는 잘못된 정보가 빚어낸 사건이었다. 마르쿠스 황제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받은 카시우스는 마르쿠스의 뒤를 이을 사람은 13살인 콤모두스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서둘러 선언하고 시리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3개 군단에서 병사들의 승인까지 얻었다.
- 황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카시우스는 뒤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제국 동방에 자기 세력을 확립하는 데 열중한 것이다. 황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카시우스의 행동은 마르쿠스에 대한 모반이었다.
- 마르쿠스에게 시리아 총독의 반란을 알린 것은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가 보낸 전령이었다. 마르티우스 베루스는 동방에서 카시우스의 권유에 응하지 않은 유일한 총독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결단]
- 175년 봄에 마르쿠스는 결단을 내렸다. 1) 서방에 주둔하는 군단의 지지를 확인하였다. 2)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하는 원로원의 결의를 확보하였다. 3) 공부하러 수도에 돌아가 있던 아들 콤모두스를 전선으로 불러서 예정을 앞당겨 성년식을 치르고 서둘러 황태자로 선언했다. 4) 전투 상태에 들어가 있던 사르마티아족과 강화교섭을 시작했다. 당시 불리한 상황인 사르마티아족은 강화를 환영했다. 나아가 북쪽의 야만족과는 이미 강화를 맺은 상태였다.
[카시우스 반란의 조기 종식]
-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마르쿠스에게 게르만 부족장들은 병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마르쿠스는 ‘로마인 사이에 생긴 문제는 로마인끼리 해결한다’며 거절했다. 이때 카시우스의 부하인 백인 대장이 카시우스를 죽이고 그 목을 마르쿠스에게 보내왔다. 마르쿠스는 오리엔트로 갈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가기로 했다. 카시우스에게 맡긴 동방의 방위력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콤모두스가 황제가 되면 그의 매형 폼페이아누스가 섭정을 할 것이다. 카시우스로서는 자신이 왜 평범한 무장인 폼페이아누스 따위한테 고개를 숙여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뛰어난 인물이 참을 수 없는 것은 평범한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 밖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방식에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반란 처리]
- 비록 카시우스의 목이 날아갔지만 아직도 카시우스에게 호감을 갖는 오리엔트 내부의 세력이 존재했다. 마르쿠스가 이집트로 가던 도중 앙카라에서 황후 파우스티나가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집트에 도착한 마르쿠스는 카시우의 반란에 누구보다 먼저 동조한 이집트 장관 스탄티아누스 한 사람만 본국에 소환한 뒤 처형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마르쿠스는 생존해 있던 카시우스의 작은 아들을 추방하고, 딸과 사위는 카시우스의 백부인 원로원 의원에게 맡겼으며, 카시우스의 재산은 전혀 몰수하지 않았다. 이 관대한 처리는 로마 원로원에 보고되었고, 원로원도 표결을 통해 이를 승인했다.
-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는 카시우스가 살해된 이후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시리아로 급히 가서 반란에 동조했던 군단을 휘하에 넣었고,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 가서 증거서류를 소각하였다. 반란의 주모자가 이미 죽은 지금, 반란에 관련된 자들을 말단에 이르기까지 숙청하면 상처만 더 깊어질 뿐이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도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으로 반란을 일으켰겠지만, 마르티우스 베루스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베루스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을 처리한 것이다.
- 176년 가을에 황제 일행은 수도 로마에 돌아왔다. 마르쿠스에게는 7년 만의 귀국이었다. 11월 27일에는 게르만인에 대한 승리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와 황태자를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거행되어 수도 주민을 열광시켰다.
[아들 콤모두스의 세습을 확립하다]
- 177년 1월 1일, 15세의 콤모두스가 처음으로 집정관에 취임하였다. 마르쿠스는 아들을 공동 통치의 파트너로 임명했다. 이전까지 가장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것은 네로(16세 10개월)였지만, 콤모두스는 네로보다 어린 15세 4개월에 ‘공동 황제’가 된 것이다.
- 그는 사위인 퀸틸리우스를 아들 콤모두스의 동료 집정관에 앉혔다. 마르쿠스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어린 황제를 매형들이 도와서 제구실을 하도록 뒷받침해주기를 기대한게 분명하다. 그렇게만 되면 제위를 둘러싼 내란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77년, 갈리아 속주에서 기독교도가 처형되다]
- 건강이 나빠져서 황제는 177년에 수도와 로마 근교의 별장을 오가면서 조용히 한해를 보냈다. 이때 갈리아 속주에서 마르쿠스 치세에 두 번째로 기독교도가 처형되었다. 그런데 177년 리옹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진 다섯 명 가운데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밝혀져 참수형에 처해진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원형 투기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이번 사형 판결에는 마르쿠스나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총독이 관여하지 않았다.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콘실리움 갈리아룸’이라고 불린 갈리아 속주민의 자치 기관이었다. 이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갈리아의 부족장 회의다. 검투사까지 전쟁에 동원된 상황이라 검투사 시합에 내보낸 것이다.
- 178년 전반까지는 평온한 생활을 계속했다. 17세 생일을 앞둔 콤모두스와 크리스피나를 결혼시켰다. 크리스피나의 할아버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중용되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측근이었던 브루티우스 플레겐스였다.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 : 178~179년】
- 178년 8월 3일 다시 전쟁터로 가기로 결정했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퀸틸리우스 형제는 둘 다 용맹하고 빈틈없고 경험도 풍부했지만,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무언가가 부족했다’
- 로마군은 179년 봄에 대공세를 시작했다. 그 해의 집정관도 둘 다 참전했다. 두 황제가 전선에 도착한 것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 무렵 북방 야만족을 한 묶음으로 다룰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먼 야만족(사르마티아족, 랑고바르드족, 반달족, 고트족, 프랑크족, 삭손족 등)이 남서쪽으로 이동한 것이 ‘가까운 야만족’이 로마 영토를 침범한 진짜 원인이었다.
- 마르쿠스 황제의 계획은 ‘가까운 야만족’을 로마에 병합하여 속주화함으로써 ‘먼 야만족’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을 때 제국의 방위선을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로마인은 처음부터 대제국을 만들 작정으로 정복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계속하다 보니 저절로 대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 마르쿠스 시대에는 아직 군사력이 충분했다. 인재를 잘못 활용하여 낭비만 하지 않으면 로마군은 아직도 압도적으로 강한 군대였다. 최고책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정책을 추진할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 179년 대공세를 시작한 로마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사람은 기병대를 지휘한 발레리누스 막사미아누스다. 판노니아 출신인 이 무장은 기병의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을 교란하고, 적이 대열을 정비할 틈도 주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그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고 로마 원로원에는 사후 승인을 요청했다. 이 전쟁에서 피해도 있었는데, 그해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인 율리우스 베루스가 전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
- 마르쿠스 황제가 쓰러진 것은 전투 개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180년 3월초였다. 마르쿠스는 총독이나 군단장으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군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 콤모두스를 도와 제국의 안전을 유지하는데 진력해 달라. 내란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
- 게르마니아 전쟁을 계속해달라. 올 가을에는 군사력으로 야만족을 제패하여 속주화의 첫 단계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약과 식음을 끊은지 나흘째인 3월 17일, 59세의 생일을 한 달 앞둔 날 죽었다. 황제로서의 치세는 19년에 이르렀다. 기질적으로는 군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으로 점철된 19년이었다.
- 콤모두스는 18세 5개월밖에 안된 나이에 단독 황제가 되었고, 죽은 아버지에게서 새로 물려받은 ‘최고제사장’ 자리뿐이었다.